번개맞은콜롬비아항공기사 4동강난여격기

번개맞은 후 활주로에 동체 착륙 '세 동강'

당국, 조종사 등 침착 대응 "기적"



(멕시코시티=연합뉴스) 양정우 특파원 = 콜롬비아에서 승객과 승무원 등 131명을 태운 여객기가 착륙 직전 번개에 맞아 불시착했지만 탑승자 대부분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16일 현지 일간지인 '엘 티엠포'와 AP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1시 49분께(현지시간) 수도 보고타발 콜롬비아 아이레스 에어라인 소속 보잉 737-200 여객기가 산 안드레스섬 공항에 내리기 80m 전에 번개에 맞은 후 활주로에 동체착륙했다.

이 사고로 여객기에 탑승했던 승객 중 아마르 페르난데스 데 바레토(여.65)가 병원 이송 도중 사망했고, 다른 승객과 승무원 등 114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공항 인근 병원 3곳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반면 다른 승객 6명은 다친 곳이 없어 사고 현장을 떠났다.

사고 여객기는 낙뢰와 동체착륙의 영향으로 세 동강 났지만 승무원과 소방 당국 등의 발빠른 대응 덕에 불은 나지 않았다고 '엘 티엠포'는 전했다.

페드로 가야르도 산 안드레스 주지사는 "기적이다. 신에게 감사드린다"며 큰 인명피해가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오를란도 파에스 콜롬비아 국립경찰 총장은 "조종사의 프로근성이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지 않도록 했다"며 조종사의 침착한 대응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국은 사고 목격자 등을 상대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by 진주맹호 | 2010/08/23 15:50 | 트랙백 | 덧글(0)

‘1950 0625’…6.25 전쟁, 사진으로 본다





◇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당시 전쟁에 직접 참전했던 국내외 유명 종군기자와 사진작가들이 남긴 생생한 희귀 사진과 각종 미공개 전쟁기록 등을 모아 사진집 '1950 0625'를 발간했다. ⓒ G뉴스플러스

한국전쟁 관련 최고의 사진기록물로 평가받고 있는 6.25전쟁 60주년 기념 사진집이 발간됐다.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당시 전쟁에 직접 참전했던 국내외 유명 종군기자와 사진작가들이 남긴 생생한 희귀 사진과 각종 미공개 전쟁기록 등을 모아 사진집 '1950 0625'를 발간하고, 16일 수원 라마다호텔에서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사진집은 민족의 비극으로만 여겨졌던 6.25전쟁의 역사적 참의미를 재조명하고 전쟁의 전 과정을 각종 사진자료와 문서, 신문기사 등을 통해 경기도 중심에서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를 위해 1만여 장에 이르는 한국전쟁 사진 가운데 600여장의 희귀 사진을 엄선했다. 이는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발간했던 한국전쟁 관련 사진기록물 가운데 가장 방대한 자료를 수록한 것이다.





◇ 낙동강방어선에서 반격으로 전환한 미군 병사들의 진격 모습(1950; David Douglas Duncan作, 상단 왼쪽)과 동료의 전사로 인해 슬픔에 잠긴 병사를 위로하는 또 다른 전우 모습(상단 오른쪽), 아래는 열차편으로 입대하는 학도병 모습으로 최초 공개되는 사진이다. ⓒ G뉴스플러스

특히 사진집에는 임응식, 이명동, 최경덕, 정도선, 최장희 등 국내 종군 사진작가와 데이비드 더글라스 던컨(David Douglas Duncan), 마가렛 버크-화이트(Margaret Bourke-White) 등 한국전쟁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라이프지 소속의 전설적인 사진작가 25명의 미공개 희귀 사진까지 함께 수록해 한국전쟁 관련 최고의 사진기록물로 평가받고 있다.

또 중국 항미원조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사진 중 김일성과 박헌영이 직접 서명해 마오쩌둥에게 보낸 중공군 지원 요청 서한 등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100여점의 생생한 전쟁 기록도 수록했다.

사진집은 총 2권으로 구성돼 있다.

제1권은 이데올로기나 군사적 대결 구도가 아닌 인간의 시각으로 바라본 전쟁 사진자료를 중심으로 줄거리를 만들어, 전체 흐름 속에서 경기도의 내용을 특화시켜 전개하고 있다.





◇ 최초로 공개되는 임응식의 파괴된 수원화성 장안문(왼쪽)과 1950년 보신각 모습. ⓒ G뉴스플러스

제2권은 6.25전쟁을 부연해 줄 수 있는 당시 행정기록, 무기·군장류 사진, 보도자료, 발표문, 전단지, 유인물, 포스터, 표어 등을 수록해 당시 상황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했다.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이번 사진집 발간을 위해 육군본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국사편찬위원회 등 관련 전문기관과의 연계를 통한 자료 수집과 철저한 자문과 고증을 받으며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16일 오전 수원 라마다호텔에서 김문수 도지사를 비롯해 한국전쟁의 산 증인인 백선엽 예비역 장군과 이명동 종군기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1950 0625' 사진집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또한 이날부터 19일까지 도청 운동장에서 열리는 '안보·재난장비 전시회' 기간 중, 6.25전쟁 기념물 출판 홍보관을 설치하고 사진집과 미공개 사진 40여점을 전시할 계획이다.

by 진주맹호 | 2010/08/17 16:17 | 트랙백 | 덧글(0)

北, 경제난에도 지속적 화력증강

"중.러.유럽서 부품수입 주력전차-무인기 개발"

(서울=연합뉴스) 김귀근 기자 = 북한이 심각한 경제난에도 지속적으로 화력을 증강하고 있다.

17일 정보당국과 국방부 등에 따르면 북한은 1990년대 초반까지 주력 전차였던 '천마호'를 대체하기 위한 신형 전차 개발에 착수, 2000년 초반 '폭풍호'(M-2000) 개발에 성공했다.

북한은 지난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한 기갑부대를 시찰한 기록영화를 지난 3월 조선중앙TV를 통해 방영하면서 신형 폭풍호 전차의 기동 장면을 공개한 것으로 확인됐다.

북한은 미사일을 제외한 신형 장비 공개를 꺼려왔다는 점에서 이번 폭풍호 전차 공개는 대외적인 '위력 과시' 등의 의도를 내포한 것으로 당국은 분석하고 있다.

폭풍호 전차는 외형적으로 중국의 82형 전차와 비슷하나 포탑과 현수장치 모양으로 미뤄 옛 소련의 T-62 전차를 개량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1990년대 노동당 군수공업부 소속의 제2경제위원회와 제2국방과학원은 자체 개발해 평양 일대에 집중적으로 배치한 천마호 전차를 교체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형 전차를 개발했다. 생산과 조립은 '류경수 전차공장'에서 이뤄졌지만 다른 군수공장에서도 부품을 제작하고 조립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국 각지에 분산된 군수공장에서 조달한 부품은 함경남도 신흥에 있는 전차공장에서 조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부품은 중국과 러시아, 동유럽 등에서 조달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북한이 이 전차를 몇 대 생산했는지는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극심한 경제난 때문에 이미 배치된 1천400여대의 천마호 전차를 대체할 만큼 생산하지 못했을 것으로 당국은 분석하고 있다.

폭풍호의 주포는 115㎜ 또는 125㎜ 활강포로 추정된다. 강선포에 비해 사거리가 긴 활강포는 고폭탄(HE), 고폭발 파편탄(HE-FRAG), 대전차 고폭탄, 날개분리 안정탄 등을 발사할 수 있다. 주포 위에는 레이저 거리측정기가 달려 있다.

포탑 상부에 옛 소련제 14.5㎜ KPV 대공포를 수동으로 설치토록한 것은 한.미의 공격용 헬기에 대응하려는 목적으로 관측되고 있다. 적외선 탐조등과 기상관측 센서도 포탑에 장착됐다.

외부에 드러난 이들 장비로 미뤄 폭풍호는 현대식 컴퓨터 사격통제시스템을 구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함께 북한은 무인항공기(UAV)를 개발해 서해 북방한계선(NLL) 일원에 배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9일 서해 NLL을 향해 117발의 해안포를 사격한 뒤에 이 무인기를 띄워 정찰한 것은 해안포 부대의 사격통제시스템을 확인하고 우리 군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의도에 따른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 무인기를 러시아제의 'DR-3 REYS'로 분석하고 있으나 군당국은 무인정찰기 또는 무인 기만기인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북한이 1990년대 말께 군사협정을 맺고 있는 중동의 한 국가로부터 연구용으로 도입한 'DR-3 REYS'는 길이 7.3m, 폭 3m로 공기 흡입식 제트엔진을 장착하고 있으며 5~50m의 저고도 고속비행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by 진주맹호 | 2010/08/17 16:15 | 트랙백 | 덧글(0)

A6M Zero figh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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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tsubishi  A6M  Zero fighter ◇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0. 8. 13

2차대전이 시작될 무렵 세계 각국이 보유하고 있던 전투기 중에서 가장 우수한 3가지를 꼽으라고 하면 누구나 독일의 Bf 109E, 영국의 Spitfire 그리고 일본의 A6M2 제로를 선정할 것이다. 사실 일본인들에게 제로가 가지는 의미는 영국인들에게 스핏화이어가 차지하는 비중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떠오르는 태양 일본제국의 영광과 함게 태평양 하늘을 제패했던 화려한 시절부터 가미가제 자살특공기로 전용되어 쓰일 때까지 제로 전투기는 일본제국의 모든 것을 상징하는 전투기이기 때문이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될 무렵 제로는 분명히 세계최고의 함상기였으며 최고의 자랑거리였던 경이로운 기동성과 무한정 날아다닐 것 같은 항속거리등으로 인해서 미해군에게서도 무적의 전투기로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 제로역시 많은 개량형이 있지만 전장의 주역으로 활동했던 형을 중심으로 알아보도록 한다.

 

 

Q. 도대체 이전투기의 정식 명칭은 무엇인가요?

A.책마다 제로, 제로셍, 레이셍, 제로센, 제로 파이터, 영전, 영식 전투기, 제키 등으로 표현되는 이 전투기의 일본내에서의 정식 명칭은 '0식 함상 전투기'입니다. 약칭은 A6M이고 개량형에 따라서 A6M2, A6M5등으로 불리게 됩니다. 미군은 Zeke라는 별도의 코드네임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 A6M2 *

1937년 일본해군은 점차로 강해지는 중국의 항공전력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신예 전투기의 개발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때까지 해군의 주력이던 미쯔비시 96식 함상 전투기 (A5M)의 뒤를 이을 전투기로서 해군이 제시한 요구조건은 지상기지에서 발진하는 다른 나라의 어떠한 공군기와도 맞설 수 있는 해군기의 확보였다. 이러한 개념은 영국이나 미국등 주요 해군을 가진 나라에서 조차 생각지도 못했던 개념이었는데, 당시로서는 완전히 시대를 뛰어넘는 이러한 발상이 제로 전투기의 등장으로 실현된 것이다. 일본의 지로 호리코시라는 우수한 항공기 설계사는 이 새로운 전투기를 개발하는데 모든 것을 걸기로 하고 미쯔비시사의 지원하에 개발을 시작했다.

수많은 설계 수정과 난관을 거듭한 끝에 개발이 시작된지 15개월만인 1939년 3월 16일에 드디어 첫 번째 원형기가 등장했으며 이후 발견된 몇가지 문제점을 수정하여 9월 14일 제식명칭 A6M1 함상전투기로서 일본해군에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이 전투기는 이전의 일본전투기들보다 강력해진 주익에 20mm 기관포 2문, 기수에 7.7mm 기관총 2정의 무장을 가지게 되었다. 이로서 본격적인 주력 전투기로서의 제로 전투기가 탄생하였다. 이 A6M1형은 테스트 성격의 기체로서 2기만이 생산되었다. 그런데 이 기체에게 더욱 우수한 성능이 부여되는 계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새로 개발된 나까지마 사카에 12 엔진의 개발이었다. 이 엔진은 925마력으로 독일이나 영국의 그것보다는 떨어졌으나 중량이 가벼운 제로에게는 천사의 날개와 마찬가지였다. 이 엔진을 장착한 형은 A6M2로 명명 되었으며 1940년에 해당하는 일본의 연호가 2600년이었으므로 해군 0식 함상 전투기 11형으로 정식 명명되었다. 그리고 이후 항모에 탑재하기 위한 약간의 개조가 적용된 해군 0식 함상 전투기 21형이 탄생하여 일본 연합함대의 주력 전투기로서 양산되기 시작했다.

 

1942년 남방작전에 투입된 A6M2 21형 제로 전투기이다. 꼬리날개의 V-103은 부대마크이며 동체의 파란줄무늬는 편대장 기임을 나타낸다. 이러한 흰동체, 검은색 기수, 붉은색 국적마크는 제로전투기가 한창 잘나갈 때의 전형적인 도색이다.

 1941년 세계를 놀라게 했던 일본의 진주만기습에 의하여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동안 연합군측에게는 베일에 쌓여있었던 일본의 신예전투기 제로가 그 모습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진주만과 동남아에서 이 날렵한 전투기에게 그야말로 묵사발이된 미공군와 해군의 전투기 조종사들은 일본의 제로전투기에 대해서 완전히 노이로제에 빠져들고 있었다. 도대체 그 이놈의 일본기는 어떻게 그토록 빠른 선회를 할 수 있으며 그토록 먼 거리를 비행할 수가 있는가? 도대체 미스테리 였다.

Mitsubishi A6M2 Zero

분 류

단좌 함상 전투기

동 력

사카에 12 공냉식 엔진 (925 마력)

최고속도

시속 533km

상승속도

분당 800m

항속거리

900km

무 장

주익 - 20mm 기관포 2문 , 기수 - 7.7mm 기관총 2정

그러나 사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제로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이 수수께끼의 전투기에 관한 보고가 수시로 미군 정보부에 들어오고 있었다. 1940년 8월경부터 초기물량이었던 15기의 A6M2 (0식 함상 전투기 11형)이 중국과의 전투에 급히 파견되어 실전 테스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경 하늘에 그 첫모습을 나타낸 이 신형 전투기들은 고도 27000피트의 상공으로 날아들어 하늘에서 중국 전투기들을 보이는 족족 격추시켜 버렸던 것이다. (당시 중국은 미국, 러시아, 독일, 영국, 프랑스 등등 이나라 저나라에서 많은 기체를 원조받아 사용하고 있었다.) 이후 약 1년간 많은 전장에서 제로전투기는 모습을 나타냈으나 자세한 정보는 노출되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 파견되어있던 미군의 한 첩보원은 본국에 일본의 한 신형전투기에 관한 첩보를 보냈으며, 비슷한 내용의 정보가 중국에서 활동중이던 미국 용병전투기부대인 플라잉타이거즈에서도 본국으로 날아왔다. 센놀트 장군이 보고한 정보의 내용은 그들이 조우하는 일본의 전투기중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신형기들이 섞여 있으며 그성능이 매우 뛰어나 미국이 보유한 모든 전투기를 능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는 그래봤자 동양인의 기술로 얼마나 좋은 비행기를 만들었겠느냐는 일종의 우월감에 의하여 미군 정보부에 의해서 사소한 것으로 취급되었고 군관계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말았다. 그리고 미국은 그에대한 댓가를 피로써 치루게 되었다. 놀라운 성능의 제로기앞에 개전초기의 미해군,공군기들은 단지 사냥감에 불과했던 것이다.

1940년 겨울 중국 항고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해군 제 12 항공대 소속의 A6M2 21형이다. 3류였던 중국공군과의 교전을 통해서 대부분의 제로 조종사들이 에이스가 되었으며 곧 동남아의 미군을 상대로한 전투에 투입되게 되었다.

진주만 기습이 시작될 무렵 일본군은 대부분 0식 함상전투기 21형으로 구성된 제로 전투기 약 400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이 민첩한 단좌전투기는 태평양상공에서 미군기들을 간단하게 유린했다. 일본국기의 색상에서 따온 흰색동체와 붉은색의 일본국적마크(미군들은 이를 피빗 고기덩어리라 불렀다.)로서 상징되는 이 전투기는 둔중한 미군기들을 놀리듯이 하늘을 휘집고 다녔다. 이 0식 전투기는 속도와 조종성은 상식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최고속도 533Km/h는 당시의 어떠한 미군기 보다도 빠른 것이었으며 2만피트까지 상승하는데 8분도 안걸렸고, 무엇보다 선회능력이 매우 좋았다. 더구나 태평양전쟁초기의 일본군 조종사들은 세계어느나라의 조종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 실전경험(중국침공을 통한..)이 있었고 근접격투전에 중점을 둔 전투비행 훈련을 받았는데 이는 제로셍의 우수한 선회능력과 결합하여 태평양의 무적의 신화를 만들어 냈다. 특히 동체 아래에 장착되는 낙하식 연료탱크를 순항속도로 7시간가량이나 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믿지 않는 군사 전문가들도 있다고 한다.) 당시 미육군의 주력기이던 P-40과 해군의 주력기이던 F4F 와일드캣은 이 제로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진주만 기습과 동아시아전투에서 선보인 제로의 위력은 미해군에게 엄청난 공포를 안겨주기에 충분했고 미군 전투기조종사들은 제로셍을 만나면 어떤 전술을 구사할것인가로 고민을 했다. (한 예로서 미드웨이 전투에서 미해군의 타치소령이 고안한 타치위브 전술은 제로전투기에 대항해서 성공적인 결과를 올리기도 했다.) 물론 제로에게도 약점은 있었으니 그것은 기체 경량화를 위해서 조종사를 보호할 장갑판이 없다는 것과 연료통에 피탄시에 누출을 막아주는 장치가 결여된 점등이었다.

1941년 11월 항모 히류에 탑재되어 진주만 공습에 참가했던 A6M2 21형이다. 낙하식 연료탱크를 장비하여 무려 7시간의 체공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전쟁초기에는 실질적인 태평양 하늘의 지배자였다.

** A6M3 **

이 형의 제로전투기는 2단 슈퍼차저가 장착된 1130마력의 사카에 21 엔진을 채택한 것으로서 속도가 약간 빨라진 것 말고는 A6M2형보다 나아진 것이 별로 없었다. 날개끝의 둥근 부분을 절단한 32형과 엔진말고는 이전형과 동일한 22형의 2가지가 존재했으며 총 560대가 생산되어 A6M2와 함께 주력으로 활동했다. 날개모양이 다른 것을 본 미군 조종사들에 의해서 처음에는 전혀 다른 전투기로 보고되었다가 후에 제로의 변형으로 알려지면서 'zeke 32'라는 코드네임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 일본 종군 화가 아라이 쇼오리가 그린 발진 대기상태의 제로 편대, 동양화적 색체의 화풍속의 전쟁이라는 주제가 이채롭다. ]

그러나 1942년 미드웨이 전투에서 일본해군이 대패를 하면서 전쟁이 중반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때부터 제로도 강력한 적들을 만나게 되었다. 강철 장갑을 두른 육중한 동체에 엄청난 2000마력의 출력을 자랑하는 엔진을 탑재한 미해군의 F6F 핼캣과 더욱 빠른 속도의 F4U 콜세어, 그리고 미육군항공대의 P-38 라이트닝, P-47 썬더볼트, P-51 무스탕등이 속속 전선에 등장하여 태평양 하늘의 지배권을 두고 제로에게 도전을 해왔다. 이들 미군기는 여전히 선회전에서는 제로에게 뒤떨어졌으나 제로보다 100km이상 빠른 최고 속도와 그리고 강력한 무장과 조종사를 보호할수있는 충분한 장갑판등이 갖추어져 단시간의 사격으로 제로를 화염에 휩싸이게 하고 이탈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현격한 속도와 화력의 차이는 제로의 기동성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 A6M5 **

특히 전쟁이 중반을 넘어서부터는 이렇게 속도와 방호력이 좋은 미군기들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1943년 부터는 속도와 화력이 강화된 A6M5 52형이 생산되었다. 엔진은 A6M3 32형과 같은 사카에 21 엔진이 사용되었으나 약간의 개량을 통해서 최고속도 시속 580km로 향상되었다. 이후 모든 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주력 전투기로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나 무거운 엔진과 무장덕분에 오히려 제로의 상징과도 같은 기동성의 측면에서는 기존의 A6M2형보다 훨씬 떨어지게 되었다. A6M5는 52b형부터 7.7mm 기관총 한정이 12.7mm 기관총으로 바뀌고 주익에는 2정의 13mm 기관총이 추가되었다.

1944년 겨울 한국의 원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해군 항공대 소속의 A6M5 52형이다. 이 항공대는 중국으로부터 내습해오는 B-29의 요격임무를 맡았었으나 큰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이로서 화력은 이전의 형에 비해서 한층 강화되었다. 하지만 기동성이라는 필살의 무기가 희생된 제로는 이제 더 이상 태평양의 주인이 아니었다. 더구나 우수한 조종사들이 대부분 전사하여 제로의 성능을 제대로 구사할 줄 모르는 미숙한 조종사들이 참가하면서 부터 더욱 격차가 심해지게된다.

 

 

 

 

 

 

 

[ 제로전투기의 조종석입니다. 미국에서 직접 촬영해 오신 사진이라는...^_^,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신 하늘사랑님께 감사를!~ 기종형식은 잘 모르겠지만 전시된 기체라는 것으로 미루어 A6M5로 추정해볼 수 있겠네요. 계기판의 좌우에 기관총의 몸체가 보이는 것이 제로 전투기의 콕핏 특징입니다. ]

대개의 경우 중반전의 태평양공중전투는 일본의 제로와 미해군의 핼캣,콜세어등의 대결이 주를 이루었는데 제로의 조종사들은 이들 미군기가 뒤에 붙는경우 좌로 상승하며 급선회하여 회피하는 것을 주요 전술로 사용하였고 미해군기들은 제로가 뒤에 붙는경우 우수한 속도와 방호력을 이용하여 하강하여 따돌렸다. 멧집이 좋은 이들 신예기들은 제로의 사격을 받아도 별로 손상을 입지 않았으며 속도를 이용해서 제르의 사정거리를 금새 벗어날 수 있었다. 더구나 제로의 빈약한 방호력은 미군기들이 단시간의 사격만으로도 제로를 불덩어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갈 때까지도 제로는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고, 미해군 조종사들은 제로가 뒤에 따라 붙는 경우 긴장해야 했다. 사실 우수한 조종사가 조종하는 제로를 효과적으로 따돌리기는 힘들었다고 한다.

애꾸눈의 에이스 (One eyed Ace)

제로셍을 몰던 대표적인 에이스에는 '애꾸눈의 킬러'로 알려진 하나인 사까이 사부로가 있다. 그는 개전당시부터 제로셍을 몰고 참가하여 종전시까지 미군기 총65기를 격추시킨 일본의 톱 에이스였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은 격추기록을 가진 일본 조종사들이 있으나 사까이는 전쟁중에 한쪽눈을 실명하고도 교관으로 조종사들을 훈련시키다가 조종사가 부족하게 되자 다시 전선에 부임하여 조국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였다. 그의 자서전 '대공의 사무라이'는 전후에 초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사까이는 일본공군의 흥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전쟁초기에 엄격한 훈련으로 최고의 기능을 연마하고 일본의 무적전투기 제로를 조종함으로써 떠오르는 태양 일본의 힘을 상징하는 조종사였다. 그러나 종전이 다가올 즈음 그는 반장님이 되 버린 모습으로 막강한 미군기들에게 필사의 사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진주만 기습이 있던날 필리핀에서 미군의 P-40을 격추시킨 이래 계속적인 격추의 행진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60번째의 격추를 기록하던날 그만 아벤저뇌격기를 와일드캣으로 오인하고 후방으로 근접하다가 아벤저의 후방석 기총사격에 한쪽눈을 실명당하고 간신히 귀환하게 된다. 그후 교관으로 활동하다가 전황이 위급해지면서 다시 전선에 복귀한뒤 이제는 구식이 되 버린 제로의 조종석에 다시 앉아서 전투에 참가하고 추가로 4기의 격추기록을 더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일본은 저물어 가는 태양이었다. 1945년 8월 13일 최후의 출격을 한번더 하기로 한 그는 동료인 가와치와 함께 달도 없는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별빛의 도움으로 도꾜상공에 떠있는 B-29한대를 발견한 그는 B-29의 격렬한 기총 반격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따라붙어 끝내 격추시켰다. 그가 자신의 65번째 격추기록을 장식한 이 B-29는 태평양전쟁에서 격추된 미군 최후의 폭격기였다.


아래의 글은 사까이 사부로의 격추기록에 대해서 Teufel 님께서 조사한 내용입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글이라고 생각되서 같이 게제합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먼저 홈페이지 일부 개편을 축하드립니다.
몇몇 페이지의 모양이 한결 산뜻해졌군요. ^^;

제가 아래 기술한 글은 이 홈페이지 "GREAT WAR PLANES" 가운데 A6M Zero기의 소개란에 등록된 사부로 사카이의 B-29기록과 관련이 있음을 밝힙니다.

'사부로 사카이가 과연 B-29를 격추시켰는가?' 하는데 대한 의문은 6.25때 공군기술장교로 참전하셨던 제 부친께서 들려주신 말씀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목격하신 실화입니다.

일본 패망이 가까워지던 시기에, 중국에서 날아온 B-29 폭격기가 서울 상공을 지나 일본을 폭격하는 일이 잦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를 요격하기 위해 서울 주변의 비행장에서 출격한 일본기들이 서울 상공에서 B-29들과 조우하는 장면이 종종 목격되었다는군요.

그런데 B-29는 30,000ft(약10,000m) 높이에서 비행하기 때문에 거대한 비행대형의 비행운 밖에는 잘 보이지 않았답니다. 물론 애국심에 불타는 일본기들이 이를 요격하려고 애를 쓰며 상승하겠지요. 그래서 B-29의 거대한 비행운 아래쪽으로 상승하는 몇줄기의 비행운이 보인답니다.

그런데 일본기에 장착된 2단 수퍼차저로도 B-29가 비행하는 고공으로 올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에(B-29에는 수퍼차저 말고도 엔진에 공급하기 위한 산소 발생장치가 별도로 있었다고 함) 어느 순간 아랫쪽에서 올라가던 가느다란 비행운이 갑자기 두꺼운 흰색 연기를 내뿜고는 아랫쪽으로 곤두박질 친답니다. 엔진 출력의 저하로 실속을 일으키는 거죠. 고도를 잃은 일본기는 다시 재상승하여 B-29를 요격하려고 어느 순간 상승하는 가느다란 비행운이 다시 나타나지만 결과는 똑같이 나타나곤 했다고 합니다.

결국 B-29 가 뿜어내는 거대한 구름은 유유히 흘러 사라지고 그 밑에 기를 쓰고 쫒아 가려는 일본 요격기들이 남긴 가느다란 구름들이 늘어진 전기줄마냥 남는다고 하더군요.

저희 아버지께서는 일본기들이 B-29를 요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잘라 말하시더군요. 그 이유로 일본기들의 부족한 수퍼차저의 성능과 낮는 옥탄가의 연료로 인한 고고도에서의 급격한 엔진 출력 저하, 그리고 결정적으로 일본 기체중에는 고고도로 상승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여압식 조종실(Pressureized Cabin)이 장치된 것이 없었다는 것이죠.

의문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1. 첫번째 의문 : 그렇다면 B-29는 과연 무적이었는가?

인터넷을 뒤져 돌아다니며 수색을 해본 결과 B-29는 태평양전쟁중 약 1.9%의 손실율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유럽 전선에서 활약한 B-17이나 B-24등 다른 폭격기에 비하면 엄청나게 적은 희생이지만, 그래도 손실율이 있다는 것은 격추 당할 수 있다는 증거죠.

2. 두번째 의문 : 그렇다면 아버지가 잘 못 알고 계셨나?

조사 결과 B-29는 당초부터 적국의 요격이 불가능한, 당시로서는 초고공의 고도에서 비행할 수 있도록 설계/제작되었습니다.

일본은 B-29를 요격하기 위해 Raiden(J2M3)을 개발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B-29의 순항고도에서 자유자재로 요격임무를 수행하기에는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제 아버지가 알고 계신 내용도 틀린 바가 없었습니다.

3. 세번째 의문 : 사부로 사카이는 눈을 다쳤다고 하던데......

익히 알고 계시다시피 몸에 수술자국은 물론 상처 하나 없어야 조종사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고고도로 올라 갔을 때 상처가 터져버리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사부로 사카이가 아무리 사무라이 집안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과연 고고도 요격이 가능했을까요? 터져 오르는 한쪽 눈을 꽉 잡고?

제 생각엔 3만ft에서는 불가능합니다.

4. 네번째 의문 : 그렇다면 B-29는 왜 격추되었을까?

또 기록들을 뒤져보니, 실제로 지나치게 높은 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한 결과, 폭격 임무의 성공율이 매우 낮았다고 합니다. 너무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다 보니 기류나 공기 밀도차의 영향을 받아 폭탄의 투하지점이 많이 흐트러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B-29는 저고도에서 폭격을 수행하기 위해, 야간 폭격 임무가 증가되었으며, 주간 폭격임무에서도 목표 지점에 가까워 오면 명중율을 높이기 위해 20,000ft 아래로 고도를 낮췄다고 하며, 손실된 B-29들은 대부분 이 때 발생했다고 추정됩니다.

5. 그렇다면 사부로 사카이의 B-29 격추 기록은 사실인가?

제 생각에는 신의를 중요시하는 사무라이 집안의 사카이 사부로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B-29를 격추시켰을 수도 있겠지만 20,000ft 역시 상처입은 눈을 가진 비행사에게는 여전히 힘든 고도였겠지요.

그래서 사카이 사부로의 격추기록과 관련된 정보를 찾아다녔습니다.


6. 결론 : 사카이 사부로는 B-29를 격추시키지 않았다.

결국 아래의 사이트에서 이를 확인하였습니다.

http://www.j-aircraft.com/books/grant-4-24-01.htm

여기에 글을 올린 Martin Grant에게, 사카이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벌인 공중전에서 B-29가 아닌 B-32 Dominator "Hobo Queen" 이었음을 직접 확인해 주었습니다. 또한 이 B-32 역시 격추시키지 못했다고 합니다.

제생각에는 사카이 사부로의 자서전을 출판한 출판사에서 패전후 실추된 자국인들의 긍지(?)를 되살리기 위해 사카이의 공적을 과대포장하고자 조작한 거짓 무용담이라고 판단됩니다. 역사도 조작하는 놈들인데 뭐 자서전 쯤이야......

제가 가지고 있는 책중에는 일본에서 출판된 서적들도 꽤 많은데, 이 사실을 알고부터 이 책들에 쓰여있는 내용들이 믿을 수 없어졌습니다.

왜놈들...... 역시 섬나라 근성은 버리지 못하는군요.

마치면서...

제국주의 일본의 상징과도 같은 제로전투기는 총 10938기의 기체가 생산되었다. 떠오르는 태양으로부터 가미가제 특공기까지 모든 것을 일본군과 함께했던 이 비행기는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시점부터 패망에 이를 때까지 모든 일본인의 희망이었다. 일본 기술력의 상징 제로 전투기는 일본제국의 피해자인 우리에게는 부러운 일이지만 분명히 항공사에 길이 남을 존재인 것이다.

by 진주맹호 | 2010/08/16 12:14 | 트랙백 | 덧글(0)

Do 335

◇ Dornier  Do 335 ◇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9. 7. 17

이번에 업데이트되는 GWP의 리뷰는 최근 불타는 하늘의 객원필진으로 활발한 활동을 해주시는 Naver 불타는하늘 카페의 루닉 (김준규)님께서 제공해 주셨습니다. 역시 이번의 리뷰도 보기드문 마이너 아이템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동안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독일공군의 비밀무기중 하나인 Do 335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렇게 좋은 자료를 불타는 하늘에 제공해주신 루닉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 기종은 내가 지금껏 보아 온 항공기들 중에 가장 매력적입니다. 확실히 Do335는 놀라운 이야기를 지녔지요. 이 항공기는 전천후 전투기로 개발되었고 야간 전투기와 훈련기로도 쓰일 수 있었어요. 난 아주 큰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그 시절에 이 항공기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빠른 피스톤 엔진 항공기었을 겁니다. 독일인들이 공표한, 21000피트 상공에서 472mph(759km/h)라는 성능 표기를 누구도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록 아주 짧은 시간밖에 보지 못했지만, 이건 정말 빠른 항공기였어요."

- 에릭 M.브라운, 영국공군 시험비행사 -

 

*도르니에의 집념

 

[클라디우스 도르니어 박사, (1884.5.14~1969.12.5) ]

쩨펠린 비행선의 설계에 참여하고. 1914년 도르니에 항공사를 창립했던 유능한 항공기 설계자 클라우디우스 도르니에는 한 개의 엔진나셀에 서로 뒷쪽을 맞대고 장비된, 탠덤 엔진 디자인을 오랫동안 연구하였다.

 

[Dornier Do J 'Wal' (Do 15/16)]

1924년 11월 6일 처녀비행한 Do J '고래'를 시작으로, 그는 이 텐덤 엔진들을 날개 위에 얹은 비행정들을 여러 가지 만들었다. 7년간 설계하고, 2년간 제작하여 1929년 7월 12일 처녀비행한 12발 비행정 Do X는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무겁고, 또한 가장 강력한 비행정이었다.

 

[뉴욕 상공을 비행하는 12발 거대 비행정 DO-X.]

비록 몇 가지 자잘한 사고와 상업적인 관심 부족으로 인해 세 대밖에 만들어지지 못했지만, 66~100명의 승객을 싣고 대서양을 횡단할 수 있는 이 ‘나는 유람선’은 그 후 십여 년간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항공기로 남았다. 그리고 1930년대 말에 이르러 그는 두 엔진 사이에 조종석을 장비한 항공기를 생각하게 되었다.

 

[도르니에의 새로운 군용기 특허안]

1937년 8월 3일, 그는 이 형태의 군용기에 대한 특허를 내기에 이른다. 최소한 세 가지의 교환 가능한 부분 - 끌어당기는 프로펠러와 엔진이 장비된 기수 부분, 조종석과 연료탱크가 장비되며 앞뒤의 방화벽으로 보호받는 가운데 부분, 그리고 미는 프로펠러와 두 번째 엔진, 미익이 장비된 꼬리 부분 - 을 가졌고, 가운데 부분은 특히 수 mm 두께의 장갑판으로 보호받는 항공기를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속폭격기 설계안, Dornier P.59-04]

이 특허가 접수될 즈음, 이미 도르니에 사의 개발진들은 특허의 내용과 거의 같은 P.59-04라는 고속 폭격기 설계안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저익 단엽의 1인승 항공기로, 하나의 동체에 앞뒤로 한 쌍의 다이믈러-벤쯔 엔진을 장비하였다. 뒷쪽 엔진의 라디에이터 흡입구는 조종석 뒤의 기체 하면에 장비되었고, 후방 프로펠러는 연장된 축으로 엔진에 연결되어 있었다. 또한 특이한 십자형 미익을 지녔고, 아래쪽 수직꼬리날개에는 꼬리 바퀴가 달려 있었다.

 

*뒤에서 밀다

전쟁이 발발하고, 1940년에 이르렀을 때에도 RML에서는 이 혁신적인 디자인에 대해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설계안은 쓸모가 없어졌다. 그러나 도르니에는 이 디자인이 항공기에 우수한 성능을 부여한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글라이더 제작사 솀프-히쓰(Schempp-Hirth)에 이 디자인의 실험기를 제작해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되었다. 실험기는 뒤에서 미는 프로펠러의 유용성과, 항공기 후방의 프로펠러를 돌리는 데 있어 긴 샤프트가 진동 없이 작동하는지를 증명해야 했다.

 

[Göpingen Gö 9]

휘터(Hütter)에서 제작된 실험기 괴핑겐 Gö 9는 1940년이 끝나기 직전 처음으로 비행하였다. 기본적으로 Do17 폭격기를 1:2.5 비율로 축소한 설계를 가진 이 비행기는 동체 중앙에 80마력짜리 엔진을 장비하고 있었다. 날개길이 7.2m, 전장 6.8m, 비행중량 720kg의 이 실험기는 220km/h의 최대속력을 냈다.

긴 샤프트로 구동되는 후방 프로펠러가 만족스럽게 작동한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RML의 태도는 여전히 냉랭했다. 그러나 도르니에는 이 설계가 성공적이라고 생각했고, 이전의 P.59를 발전시켜 새로운 설계안 P.231을 구상하였다. P.231은 세 가지 세부안으로 구성되어, 두 개의 DB605E 엔진을 장비하는 P.231/1, 두 개의 DB603 G 엔진을 사용하는 P.231/2, 그리고 P.231/3은 이후 개발이 더욱 진행되어 P.232/2가 되었는데, DB603 엔진과 Jumo 004C 터보제트 엔진의 혼합동력 항공기가 구상되었다. 그러나 1943년 가을 이 프로젝트는 취소되었으며, RLM은 다른 방안을 원했다. 그리하여 P.231 에서 몇 가지를 변화시킨 설계안이 Do335라는 제식명칭을 받게 되었다.

 

*뒤를 맞댄 두 엔진

1943년 1월 세 대의 실험기 계약이 맺어졌다. 이윽고 요격기, 고속 폭격기, 고속 정찰기 등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이 계획의 최초의 실험기인 Do335 V1이 제작되었다. 실제로 제작된 Do335는 프로젝트 P231/2의 형태와 거의 비슷한 모습을 지녔으나, 전방 엔진에 환형 라디에이터를 장비하고 후방 엔진의 라디에이터를 위해 주 강착장치 수납부 뒤쪽에 큰 흡입구가 장착되었다. 1943년 10월 26일 V1(CP+UA)이 처음 날아올랐는데, 이 실험기에 탑승한 조종사 한스 디터를은 1939년에 23살의 나이로 하인켈 He100 V8 실험기를 몰고 463.919mph(746.606km/h)의 세계 속도 기록을 세웠던 사나이였고, 당시 도르니에 사의 수석 실험조종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 비행하는 Do335 V1 ]

네 번째 비행에서, V1은 해면고도에서 373mph(600km/h)의 속도를 냈고, 이후의 비행들에서 특이한 엔진 배치 덕분에 비대칭 문제를 겪지 않고도 한 개의 엔진만으로 안정적으로 비행할 수 있다는 점이 증명되었다. 특이한 점은 후방 엔진만 사용했을 때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빠르게 비행할 수 있었으며, 이 때도 순항고도에서 560km/h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후방 엔진의 냉각 문제가 개발진의 골머리를 썩였다.

 

 

[ Do335의 조종석. 뒷부분이 전부 막혀 있다. ]

두 번째 실험기 Do335 V2 (CP+UB)는 1943년의 마지막 날에 테스트에 참가할 수 있었다. V1에 비해 변한 것은 전방 엔진 카울링의 형태와 조종석 캐노피의 열리는 방식 등이었다. 곧이어 1월 20일에는 약간 달라진 배기구와 익근부 페어링을 지닌 V3 (CP+UC)이 실험비행하였다.

 

[캐노피에 설치된 백미러]

V2와 V3 모두 조종석 캐노피에 특이한 물방울 형태의 돌출부를 지니고 있었는데, 내부에 설치된 백미러로 조종사는 후방을 살필 수 있었다. 네 번째 실험기 V4 (CP+UD)는 1944년 7월 9일에서야 처음 비행했는데, 이 기종은 하인켈에서 설계한, 높은 종횡비를 가진 날개를 지니고 있었다. 새로운 날개는 18.4m의 길이로, 고고도 성능을 염두에 둔 파생형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5번째 실험기 V5 (CP+UE)에 이르러 원래 계획했던 무장이 장착되었다.

 

[ Rheinmetal-Borsig 30mm MK103 cannon ]

장포신의 30mm MK103 기관포가 DB603 엔진의 역V자 실린더 사이를 지나 프로펠러축에  장비되었고, 엔진 위에 20mm MG151/20 기관포 2문이 더 얹혔다. MK103은 기존의 MK108에 비해 발사속도는 느렸지만, 거의 2배에 가까운 포구초속과 그에 따른 긴 사정거리를 가졌으며, 대구경 고속탄의 파괴력은 무시무시했다. 먼저 이 기관포를 장비했던 Hs129 지상공격기 등은 철갑탄을 장전하여 소련의 전차를 저격하는 데 사용하기도 하였다.

 

[ Do335의 사출좌석 ]

특이한 생김새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문제는 다름아닌 조종사의 안전한 탈출이었다. 그를 위해 조종석에 마련된 세 개의 버튼으로 위급 상황시 조종사는 후방 프로펠러, 상부 수직미익을 날려버리고, 마지막으로 앉은 좌석째로 비행기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었다. (Do335는 두 번째로 사출좌석을 장비한 프로펠러 항공기였고, 이 사출좌석은 압축 공기로 작동되었다.)

1944년 5월경까지 기체에 장비될 여러 부분에 대한 시험이 진행 중이었고, 이 시점에서 Do335는 '화살' (Pfeil)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여러 문제점이 수정된 기체인 Do335 V9(CP+UI)는 최초의 양산형인 전투폭격기 A-1형의 첫 시험기체가 되었다. 성능시험 중에 V9는 순항고도에서  472mph(760km/h)라는 고속 성능을 발휘했다. 같은 엔진을 두 기 장비한 Me410 등 다른 쌍발기체들과 비교해 볼 때, Do335는 텐덤 엔진으로 인해 줄어드는 공기저항과 후방 엔진의 특이한 라디에이터 (P-51 등이 가진 것과 같은 형태로, 냉각수의 열을 이용하여 보조 추력을 얻는다) 등의 설계가 고성능의 비결이 된 것이었다.

당시 루프트바페 최고의 전투기였던 Fw190과의 모의 공중전에서, 시험조종사 Beauvais가 스로틀을 열자 Do335는 쭉 뻗어나가더니 Fw190이 감히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앞서나갔다. 고속 성능과 무시무시한 가속력뿐만 아니라, 조종성이 우수했으며 크기에 비해 대단한 기동성을 갖고 있었다. 작업이 진전되자 V9의 설계를 바탕으로 10대의 초도양산형 A-0 (W.Nr.240101~240110) 이 생산에 들어갔다.

미군 제 8공군의 폭격이 계속되어 도르니에 시설들에 큰 피해가 발생하였지만, 프리드리히스하펜에서의 작업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9월 30일에 최초의 초도양산형 Do335 A-01(VG+PG)이 출고되었다.

 

Dornier Do335 A-1 'Pfeil'

 

분류 : 쌍발 단좌 전투폭격기

엔진 : 다이믈러-벤쯔 DB603E-1 역V자형 수냉식 12기통 엔진 2기 (1800마력)

전장 : 13.85m

전폭 : 13.80m

전고 : 5.00m

익면적 : 38.50㎡

건조중량 : 7320Kg, (비행중량 8700kg)

최대 속도 : 고도 6,400m에서 763Km/h

항속 거리 : 1380Km

실용상승한도 : 11500m

 

무장 :

  -  MK103 30mm 기관포 1문, 탄약 70발 (전방 엔진 프로펠러축)

  - MG151/20 20mm 기관포 2문, 1문당 탄약 200발 (전방 엔진 카울링상부)

 

* 날으는 대장군전(箭)

 

괴상한 형상만큼이나 이 '전투기'는 매우 큰 크기를 자랑했다. 키가 아주 크지 않다면, 이 비행기 밑에서 머리를 숙이지 않고 걸어다닐 수도 있었다.

 

[길쭉한 생김새와 달리 Do335는 매우 거대한 전투기였다.]

전금속제 모노코크 구조의 기체 맨 앞에는 DB603 A-2엔진과 그에 물린 3.5m짜리 역피치 프로펠러가 달려 있었다. (역피치 프로펠러는 착륙 활주거리를 25% 정도 줄여 주었다.) 조종석 뒤에는 1230리터 들이 연료탱크가 자리잡고 있었고, 후방 엔진은 기체 맨 끝으로 이어진 축을 통해 후방의 미는 프로펠러를 돌렸다. 동체 중앙 하부의 내부 무장창에는 500kg의 폭탄이나, 투하 가능한 500리터 들이 보조 연료탱크를 달 수 있었다.

 

[ Do335의 심장, Daimler-Benz DB603 엔진 ]

한 개의 박스 형태의 스파 구조물과 전금속제 응력외피로 이루어진 주익의 앞전에도 각기 310리터 들이의 자동봉입장치가 완비된 연료탱크가 장비되었다. 다른 쪽에는 플랩과 유압식으로 작동되는 에일러론이 장비되었다. 십자 형태의 미익은 거의 전금속제였지만, 수직 미익의 앞전은 나무로 만들어졌다. 하방 수직미익의 끝에는 범퍼가 장치되었고, 이 미익 전체는 동체착륙시 떼어 버릴 수 있었다.

 

* 다재다능한 항공기

초기 생산 계획은 44년 2월부터 잡혀 있었지만, 개발 과정의 지연으로 인해 실질적인 양산은 오베르파펜하펜에서 10대의 초도양산형 A-0이 생산된 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최초의 양산형 Do335 A-1 전투기는 더 강력한 1800마력의 DB603 E-1 엔진 한 쌍을 장비했고, 기본적인 무전기, 피아식별장치, 라디오 착륙유도장비를 갖추었으며, 동체 하부의 무장창에 2개의 ETC 501 A-1 폭탄랙을 장비하여 각기 250kg 폭탄이나 300리터들이 투하식 연료탱크를 장비할 수 있었다.

 

[ 공장에서 생산 중인 Do335들 ]

A-2형은 고속 폭격기로 계획되어, 두 개의 DB603 G엔진을 장비하고 1000kg의 폭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 전황이 악화되어, A-2형의 생산은 진행되지 못하였다. 고고도에서의 엔진 보조장치 GM 1과 MW50 파워 부스터를 모두 갖춘 A-3형은 주간 중전투기로 운용될 계획이었으나, 역시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 대도 완성되지 못했다.

또한 장거리 정찰기로써의 사용도 건의되어, V1과 V3이 스카파플로우의 영국 함대 사진정찰과 런던 정찰에 각각 투입되어 몇 번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하부 무장창에 Rb 50/18 카메라 2기를 장비한 A-4의 설계는 이미 완비되어 있었다.

7번째 실험기 V7은 융커스 공장에 보내져 Jumo 213 엔진에 관한 테스트를 받았으며, A-5/-7/-8/-9 등의 형식이 이 엔진을 장착할 예정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 어떤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 Do335 A-6의 Cut-away 그림 ]

1944년 가을 들어, 이 다재다능한 항공기를 야간 전투기로 써 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야간전투기 Do335 A-6의 설계는 기본적으로 A-1과 같았으나, 조종석 뒤쪽에 레이더조작수를 위해 튀어나온 좌석과 하인켈 특제 사출좌석이 마련되었다. 이에 주 연료탱크의 용량이 절반 이상 (A-1형 1230리터, A-6형 600리터) 줄어들었고, 주익 아래에 두 개의 300리터 들이 보조연료탱크를 장착하여 이를 보완하였다. 또한 두 개의 작은 MW50 분사장비가 주익에 장착되어 짧은 시간 동안 2000마력의 강한 힘을 내게 하였다.

 

[ SN-2 레이더의 안테나 ]

또한 기본 라디오 장비와 함께 FuG220 '리히텐슈타인 SN-2' (이후 경량화된 FuG218 넵튠 V로 교체되었다.) 공중 요격 레이더와 FuG350 '낙소스Z' 역탐지 레이더, 지멘스 FuG 101 라디오 고도계가 장비되어, 이 장비들을 위해 주익에 구이용 꼬치처럼 생긴 4개의 안테나가 장비되었다. 무장은 단좌형과 동일한 기수의 3문의 기관포가 유지되었고, 무장창에는 500리터 보조연료탱크나 500kg의 폭탄을 장비할 수 있었다. 이 장비들이 증가시킨 공기저항은 최대 속도를 70km/h 가량 떨어뜨렸지만, 그래도 Do335 A-6은 독일이 가진 가장 빠른 야간전투기 중 하나였다.

 

Dornier Do335 A-6 'Pfeil'

 

분류 : 쌍발 복좌 야간전투기

엔진 : 다이믈러-벤쯔 DB603A 역V자형 수냉식 12기통 엔진 2기 (1750마력)

전장 : 13.85m

전폭 : 13.80m

전고 : 5.00m

익면적 : 38.50㎡

건조중량 : 7830Kg, (비행중량 10100kg)

최대 속도 : 고도 6,400m에서 688Km/h

항속 거리 : 1330km

실용상승한도 : 10190m

 

무장 :

  - MK103 30mm 기관포 1문, 탄약 70발 (전방 엔진 프로펠러축)

  - MG151/20 20mm 기관포 2문, 1문당 탄약 200발 (전방 엔진 카울링 상부)

 

 A-6의 실험기체로 만들어진 V10(CP+UK)는 1945년 1월 24일 처음 비행하였다. A-6을  위해 V16, V15, V21, V22 네 대의 실험기가 더 만들어졌으며, 결빙 방지장치, EZ-42 자이로 조준기, 메서슈미트 P 8 고속 역피치 프로펠러 등 루프트바페의 기종들을 위한 최신 장비들이 지속적으로 Do335 실험기들에게도 제공되었다.

 

*더해지는 혼란 속에서 

 A-6의 실험비행이 있던 날, 베를린에서는 전천후 전투기 개발을 위한 협의가 있었다. 도르니에 사장은 1945년 3월까지 50대의 A-6을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포케볼프 사의 쿠르트 탕크 박사 등에 의해 야간 전투기로써의 Do335의 효율에 대한 의심이 제기되었다. 약간의 논의 후 Do335의 야간전투기형과 혼합동력(후방 엔진을 제트엔진으로 교체하는) 파생형을 개발,시험하는 것만이 허용되었으며, 두 방안 모두 비용이 너무 많이 들 경우에는 폐기하도록 결정되었다.

 

[ 수리 중인 Do335. 슈나우퍼가 망가뜨렸던 기체이다. ]

 야간전투기의 실험에는 불후의 야간 전투기 에이스인 볼프강 슈나우퍼가 참여하였다. A-1형을 몰아 보고, 한 번은 추락하여 위기를 모면하기까지 한 그는 쉬라게 무지크 등의 야간전투기용 장비를 권하기도 하였다. V10은 Ta154 야간전투기 등의 다른 실험기종과 함께 야간전투기 부대 NJG3의 제 1그루페에 넘겨져 실전 테스트를 받았다.

 

 한편 두 개의 조종 장비를 갖춘 훈련기형의 개발도 시작되고 있었으며, 후방에 불룩 튀어나온 교관석을 갖춘 A-10, A-11, A-12 등의 훈련기형이 기획되었다. DB603 A-2 엔진을 장비한 A-10형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세 기가 완성되고, 두 대가 제작 중이었다. A-11형은 실전형에 쓰이는 DB603 E-1 엔진을 얹은 형식이었고, A-12형은 Jumo 213 엔진을 얹은 훈련기였다고 추정되나, 자료의 손실로 인해 이 부분은 확실치 않다.

 

*궁극의 구축전투기(Zerstörer) 

다른 한 편 1944년 여름부터 여덟 가지의 진보된 B형 기종들이 기획되고 있었다. 첫 번째 B-1은 단좌 주간 전투기로, A-1형과 거의 비슷하였으나 방풍창의 방탄유리와 몇몇 다른 장치를 지니고 있었다.

 

[ A형(왼쪽)과 B형(오른쪽)의 차이. 방탄유리가 설치되었다. ]

그러나 B-1은 B-2에 묻혀 잊혀지게 되었다. V13과 V14가 Do335 B-2 구축전투기의 사양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두 항공기는 매우 중무장한 형태로써 주익에 불쑥 튀어나온 2문의 MK103 30mm 기관포를 지니고 있었다.

 

Dornier Do335 B-2 'Pfeil'

 

분류 : 쌍발 단좌 중전투기

엔진 : 다이믈러-벤쯔 DB603E-1 역V자형 수냉식 12기통 엔진 2기 (1800마력)

전장 : 13.85m

전폭 : 13.80m

전고 : 5.00m

익면적 : 38.50㎡

건조중량 : 7360Kg (비행중량 10000kg)

최대 속도 : 770km/h (고도 미상)

실용상승한도 : 10190m

 

무장 :

  - MK103 30mm 기관포 1문, 탄약 70발 (전방 엔진 프로펠러축)

  - MK103 30mm 기관포 2문, 1문당 탄약 70발 (양측 주익)

  - MG151/20 20mm 기관포 2문, 1문당 탄약 200발 (전방 엔진 카울링 상부)

 

Do335 B-3 구축전투기는 B-2와 기본적으로 같았으나, 더 강력한 DB603 LA엔진을 장비할 예정이었다. V18과 V19가 B-3의 사양으로 제작될 예정이었으나, 한 대도 완성되지 못했다. 이 구축전투기들은 매우 중무장한 주간 전투기들로써, 주로 주간에 공습해 오는 연합군의 폭격기를 박살내는 목적이었다.

 

[ B-2, B-3의 주익에 추가된 기관포를 볼 수 있다. ]

대구경 고속탄을 토해내는 3문의 MK103과 속사가 가능한 2문의 MG151/20은 B-2와 B-3이 단숨에 단발기 몇 대 분의 화력을 토해낼 수 있게 해 주었다. 따라서 몇 발만 제대로 명중하더라도 연합군의 4발 중폭격기를 박살낼 수 있었다.

또한 프로펠러축에 MK103 대신 55mm MK112 중기관포를 장비하는 계획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무기를 장착한 Do335는 한 대도 없었지만, 272kg의 무게에 분당 300발을 발사하는 이 대포는 항공기에게 가공할 위력을 보였을 것이다.

 

[ Do335 B-4의 거대해진 주익 ]

Do335 B-4 정찰기는 A-4형과 거의 흡사한 장비를 갖추었지만, 하인켈에서 만든 높은 종횡비를 가진 18.4m짜리 (익면적 43㎡) 주익을 달고 2단 슈퍼챠져가 달린 2000마력짜리 DB603 LA엔진을 장착하고 있었다. 이에 맞추어 B-5 훈련기도 이 날개를 갖추었다.

 

B-6은 A-6과 거의 비슷한 야간전투기였지만, 구조적으로 강화되고 새로운 노즈휠을 갖춘 형식이었다. 하인켈의 신형 주익과 DB603 LA엔진을 가진 야간전투기형으로 B-7이 계획되어 있었으며, 마지막 B형인 B-8 또한 그 날개를 가진 고고도 야간전투기형이었다. 또한 Do335의 후방 엔진을 제트엔진으로 대체하거나, 쌍동체 항공기를 구상하는 등의 개발 계획이 많이 마련되어 있었으나,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거의 없다.

 

*짧게나마 독일을 누비다 

1944년 9월 4일, 실험 비행대 Ekdo335가 창설되었다. Ekdo335의 두 개의 임무는 각기 영국의 모스키토 전폭기를 잡아내는 야간전투 방식을 개발하는 것과 전폭기, 정찰기형의 전술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10월 26일에는 독일의 방공포부대에 Do335의 특이한 형상에 대한 식별 요령이 전달되었다.

연합군이 Do335를 목격한 기록은 찾아보기 드물다. 1945년 4월 중순에는 엘베강 상공에서 영국공군 제 3스쿼드론의 템페스트 전투기들이 정체불명의 텐덤엔진 항공기를 추격했으나, 너무 가속력이 좋아 따라잡을 수 없어 놓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미국 제 15공군의 325비행전대의 머스탱들에게 목격되었다는 기록에서도 Do335는 빠른 가속력으로 적기를 따돌리고 도주했다.

 

 

*패배자의 기술

1945년 4월 미군이 오베르파펜하펜의 도르니에 공장을 접수했을 때, 몇 대의 완성된 Do335와 조립되고 있던 더 많은 Do335가 발견되었다. 여러 대는 연합군의 공중 공격에 피해를 입었지만, 두 대의 비행 가능한 Do335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중 한 대인 선행양산형 W.Nr.240102는 미국의 노획장비 식별번호 FE-1012가 붙여져 여러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 공장을 접수한 미군 관계자들 ]

미 해군은 Do335에 상당한 인상을 받았으나, 후방 엔진 오일쿨러의 잦은 고장에 결국 실망했다고 한다. 1947년, 미 해군은 이 FE-1012를 스미스소니언 재단에 기증했다.

 

[ 전리품으로 선적되는 Do335 ]

미군에 접수된 Do335 중 두 대는 영국 조종사들에게 넘겨졌다. 2인승 훈련기인 A-10 (W.Nr.240112) 한 대는 1945년 9월 8일 판보로 에어쇼에 전시되었고, 한 번의 완전분해 정비를 마친 후 10월 1일 시험비행하였다. 영국 시험조종사들은 이 항공기를 매우 호평하였으며, 유명한 실험조종사 에릭 브라운은 이 항공기가 완벽한 야간 전투기라는 평을 내놓았다. 슬프게도 이 Do335는 그 다음해 1월 18일, 시험비행 중 후방엔진의 화재로 수평꼬리날개가 타 버리는 바람에 수직으로 추락하여 조종사의 목숨까지 그 자리에서 앗아가고 말았다.

 

[ 프랑스에서 부서진 Do335 V10 ]

영국이 얻은 또 다른 Do335는 초도양산 A-0 10기 중의 한 대로써, 프랑스에서 실험을 받았다. 1945년 12월 13일, 세 번째 시험비행을 마치고 착륙할 때 전방 랜딩기어가 고장나 내려오지 않았고, 무사히 비상착륙을 성공하긴 하였으나 슬프게도 다시는 비행하지 못했다. 프랑스 또한 최소한 두 대의 Do335 (두 대의 시험기 - 야간전투기 V10과 구축전투기 V13)를 노획하였다고 알려졌으며, 그 중 V10은 동체 착륙을 감행하던 중 크게 부서지고 말았다.

 

[ 복구 중인 Do335 ]

전쟁이 끝나고 30년이 지난 1975년, 미국의 창고에 있던 유일한 생존기체인 FE-1012는 독일 도르니에 공장으로 넘겨져 완벽히 복원되었다. 항공기를 수리하던 기술진들은 30년 전 후방 프로펠러와 수직 꼬리날개에 장착된 폭발 볼트가 그대로 남아 있고, 그대로 작동하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 복원된 Do335는 그 다음해 5월 1일부터 9일까지 하노버 에어쇼에서 전시되었고, 1986년까지 뮌헨의 독일 박물관에 임대되었다.

 

[ 현재 미국 박물관에 전시중인 Do335 ]

이 유일한 생존기체는 현재까지 미국의 국립 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그 옆에는 유명한 Ar234 B-2 제트폭격기와 역시 유일하게 남아 있는 He219A의 동체가 전시되어 있다.

 

*마치면서

맨 처음 소개했던, 영국 조종사 에릭 브라운의 언급과 같이 이 항공기는 2차대전 중 독일에서 만들어진 항공기 중 가장 특이한 기체 중 하나였다. 터보제트 엔진이 출현하지 않았다면, 2차대전 이후의 프롭 전투기들은 이 항공기의 선구적인 형상을 따라갔을 것이다. 또한 당시의 쌍발 프로펠러 전투기의 한계를 넘고, 다양한 임무에 대응할 수 있는 점에서 이후 나타난 멀티-롤 전투기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는 더 이상 피스톤 엔진과 프로펠러를 허락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급격한 변화를 초래한 터보제트 엔진과 한창 격해지는 냉전, 바짝 다가온 초음속 시대는 이 걸출한 항공기를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걸작으로 만들고 말았다.

 

◆ Do 335 일러스트 Collection ◆

 

 

Do335 V1. (CP+UA) 1943년 10월 26일 최초로 비행하였다.

 

 

Do335 V4. (CP+UD) 하인켈에서 설계한 고고도용 주익을 달았다.

 

 

Do335 V10. (CP+UK) 복좌 야간전투기 A-6형의 원형으로 제작되었으나, A-6과는 다른 형태의 후방석을 가지고 있다.

 

 

Do335 V11. (CP+UL) A-10형 복좌 훈련기의 시험기이다.

 

 

Do335 V13. 주익에 무장을 장비한 B-2형 중전투기의 원형기이다.

 

 

Do335 A-1. 미군에 노획된 후의 도장이다.

 

 

Do335 A-10. 1946년 1월 영국에서 추락하여 파괴되었다.

 

by 진주맹호 | 2010/08/16 12:13 | 트랙백 | 덧글(0)

F8F Bearcat

◇ Grumman  F8F  Bearcat ◇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9. 11. 11

불타는하늘의 개장 1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항상 개장 기념일이 되면 홈지기가 업데이트를 하고는 했었는데, 이번에는 홈지기의 개인사정으로 뭔가 허전한 기념일이 될뻔했었으나 최근 왕성하게 레어 아이템에 해당되는 전투기 리뷰를 보내주시는 불타는하늘 네이버 카페의 루닉님의 기고 덕분에 이번에도 개장기념일에 업데이트가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이번의 리뷰는 미해군의 날쎈돌이 F8F 베어캣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늘 좋은 자료를 불타는 하늘에 제공해주시는 루닉님께 감사드립니다.


 

*지옥에서 올라온 말괄량이, 그 다음 타자는?

 

['Hellcat'은 영어사전에서 '말괄량이'로 번역된다.]

 1943년, 그루먼 사가 생산하는 F6F-3 헬캣은 태평양 전선에서 호평을 받으며 일본 항공기를 제압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군과 그루먼은 모두 F6F는 당면한 전선에서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적절한 성능과 튼튼함을 겸비한 전투기이기는 하였으나, 같은 엔진을 장비한 F4U 콜세어나 P-47에 비해서도 떨어지고 있었으며, 일본이 새로운 전투기를 내놓는다면 F6F의 우세마저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

 

[Boeing XF8B-1, Curtiss XF14C-1. 특이하게 모두 이중반전 프로펠러를 지녔다.]

 그루먼 사에게는 다행히도 당장은 F4U가 항공모함에서 운용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하여 함상 전투기로는 계속 F6F가 쓰였지만, 해군은 새로운, 더욱 우수한 성능을 지닌 전투기를 원했다. 해군에게 접수된 보잉의 XF8B-1, 커티스의 XF14C-1은 모두 헬캣보다 크고 육중한 신형 실험 전투기였으나, 둘 모두 F6F보다도 별로 뛰어나지 못했고 따라서 모두 퇴짜를 맞았다.

 

*그루먼 철공소, 도살새를 접하다.

[Fw190, 당대 공냉식 엔진 전투기의 정점에 있었다.]

 한편 그루먼 사의 실험조종사인 밥 홀은 영국에서 보내진 독일의 Fw190을 몰게 되는 기회를 얻었다. 우수한 비행성능과 강력한 무장으로 '도살새'라는 별명을 얻은 Fw190은 강력한 BMW 801 성형엔진과 최대한 소형 경량화된 동체의 조합으로 우수한 성능을 확보하는, 지극히 독일스러운 전투기였다.

 홀은 강한 인상을 받고 사장 로이 그루먼에게 급히 보고서를 올리기에 이르렀다. 이 영향으로 로이 사장은 자사의 설계안 중 58번 디자인에 강한 인상을 받았는데, 이는 작고 가벼우며 조종성이 높고 강한 엔진을 지녀 현재 설계중이거나 배치된 어떤 전투기보다도 높은 성능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미국은 지정학적, 기술적, 자원적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루먼도 미국 회사였기에, 그 세 가지의 혜택을 입었다. 1943년과 44년 사이, 제3제국과 일본에는 폭탄비와 불벼락이 내리고 있었지만 미국 본토는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주어진 자원은 무한정이었다.

 

[독일에 다이믈러-벤쯔가 있었다면 미국에는 '더블 와스프'가 있었다.]

 여러 번 거듭 검증된 강력하고 튼튼한 엔진인 R-2800 '더블 와스프' 가 있었으며, 새 기체에 대한 컨셉과 아이디어도 충분했다. 그리하여 그루먼 철공소에서 벼려지는 여덟 번째 해군 전투기 XF8F-1은 조종사에게 좋은 시야를 제공하는 물방울형 캐노피, 공기저항을 줄여주는 민머리 리벳, 두터운 알미늄합금 응력외피를 가진 미끈한 전투기로 담금질 되어지고 있었다.

 

[미 해군 전투기답게 베어캣도 튼튼한 날개접기 장비를 지녔다.]

 어떤 의미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육중했던 헬캣에 비해, F8F는 모든 면에서 무게를 줄이기 위한 철저한 노력이 들어갔다. 그럼에도 조종석, 엔진, 오일쿨러에 충분한 장갑을 둘러치기 위해 내부 연료탱크 용적은 160갤런으로 제한되었으며, 날개접기 장비와 착함후크 등은 수동으로 조작되었다.  미제 전투기 치고는 부족해 보이는 무장인 4정의 50구경 중기관총은 각 날개의 랜딩기어 가동부와 주익이 접히는 부위 사이에 장비되었다.

 

[기체에 비해 과도하게 커 보이는 베어캣의 프로펠러.]

 12피트 7인치(약 4m) 직경의 대형 4엽 정속 프로펠러는 필연적으로 랜딩기어의 길이를 길게 했으며, 이 랜딩기어를 날개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완벽히 수납하기 위해 유압식 장치로 길이를 늘리고 줄였다. 긴 다리가 제공하는 넓은 궤간은 좁은 비행갑판 위에서 R-2800 엔진의 강력한 토크를 쉽게 버틸 수 있게 하였다.

 

*해 뜨는 제국을 쳐라

[XF8F-1의 사진. 실험기를 나타내는 흰색 TEST가 도색되어 있다.]

 1944년 8월 21일 밥 홀은 첫 시험기인 XF8F-1의 조종석에 앉았다. 처음에는 홀은 이 신형기의 조종성에 그리 만족하지 못했다. 기류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수평미익에 와류를 만들었던 오일쿨러의 위치를 주익 내측 전단 으로 옮기자, 홀은 이 비행기가 함상전투기 경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호언했다. 이어진 시험 비행들에서도 XF8F-1은 그것을 이뤄낼 자질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해군은 정말로 F8F를 선택했고, 고양이과 동물을 항공기의 이름으로 붙이는 그루먼 사의 전통에 따라 'Bearcat' (사향고양이) 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Operation 'Olympic'. 일본 본토 점령&초토화 작전인 Operation Downfall의 일부로

 일본 남부를 상륙, 침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두 번째 계약에서 해군은 한 달에 100대의 비율로 2,000대의 F8F-1을 생산해 줄 것을 주문했고, 1945년 11월 1일로 예정된 올림픽 작전에 베어캣을 투입할 수 있기를 원했다. 생산계획에 따라 F6F-5 헬캣의 생산은 1946년 1월 F8F 생산라인들이 완비되는 즉시 중단되기로 결정되었다. 또한 해군은 그루먼의 협력사인 이스턴 항공사(GM, 즉 제너럴 모터즈의 자회사로, 어벤져 뇌격기의 77%와 와일드캣 전투기의 79%를 생산했다.)의 린든 공장에서 F3M-1이라는 이름으로 베어캣 1,876대를 주문했다. (이스턴에서 베어캣을 생산하고 있던 와중, 전쟁이 끝나자 계약은 파기되었다.)

 

*항공모함에 오르다 (F8F-1, 실전배치)

 

[USS Ranger 함상에서 테스트를 기다리는 베어캣]

 1945년 2월 17일, 미국 동부 체사피크 만에 정박한 호위항모 USS Charger (CVE-30) 함상에서 로버트 M.엘더 대령(당시 소령)이 베어캣의 조종석에 앉아 이륙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 날의 F8F에 대한 항공모함 적합성 검사에서 어레스팅 후크를 이용한 15번의 착함에 성공하였다. 그루먼 철공소의 작품답게 F8F는 여러 모로 항공모함에서 운용하기 좋았고, 모든 크기의 항공모함 (특히 소형의 호위항모) 에서 작전할 수 있었다. 실전에 대비한 몇 가지 개수와 폭장 능력이 추가된 이후 VF-18, VF-19 비행대에 베어캣이 보급되었다. 해군은 이 비행기를 빨리 실전에 투입하고 싶어했으나, 어느새 때는 1945년 5월이었다.

 처음으로 베어캣 비행대를 구성한 VF-19는 원래 렉싱턴 함상에서 헬캣을 몰던 비행대로, 몇몇 베테랑 조종사들이 남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구성원은 갓 훈련을 마친 소위들이었다. 이전부터 이 비행대가 F8F 비행대로 전환될 것이란 소문이 돌았고, 몇몇 조종사들이 뉴욕 베스페이지의 그루먼 공장으로 전출되어 전환 훈련을 받게 되자 이 사실은 확실해졌었다. 전환훈련을 받는 조종사들 손에서도 베어캣은 사소한 기계, 유압계통 문제 이외에는 별 탈을 내지 않았다.

 VF-19는 모든 종류의 사격 훈련(대공/대지 기총사격, 활강/급강하 폭격, 로켓 발사)을 받았고, 7월 25일~27일 사이에는 호위항모 USS Takanis Bay(CVE-89)함상에서 훈련을 받았다. 8월 1일 전투준비를 끝마친 VF-19 대원을 싣고 갑판에 베어캣을 가득 실은 USS Langley(CVL-27)이 캘리포니아 알라메다에서 출항했지만, 8월 16일 태평양을 건너던 도중 그들은 전쟁이 끝났다는 무전을 받았다. 결국 한 대의 베어캣도 2차대전 동안 적들에게 그 발톱을 드러내지 못했다. VF-18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실전을 겪을 뻔했지만, 그들도 역시 기총 한 번 쏘아보지 못했다.

 

[USS Ranger 함상에서 VF-18 소속의 F8F가 이륙하고 있다.]

 2차대전 이후의 군축 물결 속에서 많은 정비사들과 조종사들이 제대했지만, 1946년 11월경에는 아홉 개의 전투비행대가 베어캣으로 기종을 전환하였다. 이 때 모든 미 해군의 비행대가 이름을 전환하게 되어, 예를 들어 VF-18은 새 명명법에 의해 VF-18A가 되었는데, 접미사 'A'는 '공격' 임무를 담당하는 항모에서 작전하는 비행대에 붙는 이름이었고, 접미사 'L'은 인디펜던스급의 경항모에서 작전하는 비행대에 붙여졌다.

 

 [베어캣은 한쪽, 혹은 양쪽 윙팁을 모두 잃고도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었다.]

 

 1945년 12월에는 큰 사고가 벌어졌는데, F8F-1 한 대가 거의 수직으로 급강하 폭격을 감행하다가 상승하면서 순간 11G에 달하는 중력 가속도를 받았고, 급기야 왼쪽 윙팁이 뜯겨나간 사건이었다. 실험 비행에서 베어캣은 한 쪽 혹은 양쪽 윙팁을 모두 잃더라도 안정적으로 조종되어 귀환할 수 있었고, 사고를 경험한 파일럿도 반대쪽 에일러론을 이용하여 적절히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폭발 볼트가 설치된 안전 윙팁(한 쪽이 떨어져 나가면 다른 한쪽도 분리하여 균형을 잡도록 되어 있었다.)의 실효성에 대한 회의가 들었고, 급기야 전 기체에 오버홀을 실시하여 폭발볼트를 제거하고 새로이 두터운 리벳으로 윙팁 부분을 강화하였으며, 새로이 생산되는 모든 베어캣에도 이 개수를 적용하였다.

Grumman  F8F-1  Bearcat

분류 : 단발 단좌 함상전투기

엔진 : 프랫&휘트니 R-2800-34W '더블 와스프' 복열 18기통 공냉식 성형엔진 (2100마력)

전장 : 8.61m

전폭 : 10.92m

전고 : 4.21m

자체중량 : 3,207kg (전비중량 4,534kg)

최대속도 : 고도 19700ft(6,000m)에서 678km/h

항속거리 : 1,778km

 

무장 :

주익 : 12.7mm M2 중기관총 4정 (F8F-1B : 20mm M3 기관포 4문)

4발의 5인치 (127mm) 무유도 로켓탄, 1,000파운드 (454kg)의 폭장

 

*발톱과 눈을 더하다

1944년 합동 전투기 회의에서 여러 미군기 간의 모의 공중전이 벌어졌다. 모든 참가자들은 베어캣의 우수한 비행성능에 큰 인상을 받았으나, 좁은 조종석과 빈약한 무장에는 혹평을 퍼부었다.

 사실 미군의 다른 전투기들에 비해, 베어캣의 무장은 꽤 허약했다. 브라우닝 중기관총은 여전히 강력했지만, 6-8정을 장비하던 다른 전투기에 비해 베어캣에는 고작 4정이 장착되어 있을 뿐이었다. 비록 개발 당시에는 50구경 기관총 4정은 장갑이 얇고 구조적으로 빈약한 일본 항공기들에게는 충분했지만, 이제 베어캣이 상대해야 되는 가상의 적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새로운 적인 붉은 군대의 전투기들은 점점 더 빨리지고, 또한 점점 더 튼튼해지고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세이버의 12.7mm가 미그에게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는 공산진영 측 주장을 생각해 보라.)

 

[20mm M3 기관포. 히스파노-수이자 HS.404의 미국 개량형이다.]

 따라서 기존의 F8F-1들에 20mm M3 기관포를 장비하는 작업이 이루어졌고, 무장만 교체된 이 F8F들은 F8F-1B로 명명되었다. 약간의 중량 증가를 제외하고는 베어캣은 이 새로운 무장에 아주 적합한 기체였고, 따라서 기체의 화력은 크게 증가되었다.

[질주하는 그루먼의 두 밤고양이. (F8F-1N, F7F-3N)]

 한편 이전의 헬캣과 콜세어, 그리고 쌍발의 F7F 타이거캣에 베풀어진 것처럼 F8F-1의 일부도 레이더를 장비하고 야간전투능력을 부여받았다. 1946년 동안 12.7mm를 장비한 F8F-1들이 야간전투에 적합한 몇 가지 개조와 함께 오른쪽 날개 하단에 레이더를 장비하고 F8F-1N이라는 제식명으로 일선에 배치되었지만, 조종사가 레이더 조작과 전투 임무를 모두 수행해야 된다는 점에서 쌍발기인 F7F-3N에 비해 그리 좋은 평을 받지는 못하였다.

 

[F8F-2의 대형화된 수직미익]

 1947년에 이르러 프탯&휘트니는 원래의 베어캣에 장비하도록 되어 있었던 2,250마력의 R-2800-30W 엔진을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이를 장비한 새로운 베어캣들이 생산되었다. 새로운 F8F-2에는 F8F-1B부터 표준 장비된 4문의 M3 20mm 기관포가 주익에 장비되었고, 강력한 토크에 견디기 위해 수직미익은 12인치나 길어졌다. 최대 속도 또한 기존의 678km/h에서 단숨에 732km/h로 증가되었다. 그루먼은 1947년 10월부터 1949년 5월 31일까지 총 282대의 F8F-2를 생산하였다.

 

[시대의 조류는 매몰찼다. F8F-2P와 그를 대체할 F9F-2P가 나란히 비행하고 있다.]

 많은 조종사들은 F8F-1과 F8F-2를 좋아했지만, 불행히도 격변하는 시대에서 프로펠러 전투기가 살아남기는 어려운 일이었고, 범용성마저 부족했던 베어캣의 입지는 계속 좁아지고 있었다. 몇몇은 해병대 훈련기로 사용되고, 몇몇은 무인표적 조종용 기체로 개조되었으며, 1950년에는 해군의 고등 훈련기로써 F6F-5를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F8F-1처럼 레이더를 장비한 F8F-2N과, 사진정찰기형인 F8F-2P도 소수 개조되었다.

 

[1953년, 고등훈련비행대의 F8F 여덟 대가 편대비행하고 있다.]

 1955년 6월, 마지막 비행대가 베어캣을 퇴역시키고 새로운 제트기로 갈아탔다. 그 다음해에 F8F-2들은 해군의 물자 목록에서 퇴출되어 보관 시설로 들어갔다. 다가오는 제트 시대의 마지막 희생양으로써, 사향고양이의 본 고향에서의 경력은 이렇게 종료되었다.

 

*푸른 천사들

 한편 2차대전이 종결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지금 '푸른 천사들' 이라 알려진 해군 곡예비행단이 창설되었다. 플로리다 주 잭슨빌의 해군 항공 스테이션에서 몇몇 2차대전 베테랑들을 모아 결성된 이 팀은 처음 네 대의 F6F-5 헬캣을 선택했고, 팀 멤버들과 자원봉사자들의 손에서 재도장되었다. 처음 이 비행기들은 현재의 블루 엔젤스가 쓰는 푸른색보다 더 진한 푸른 바탕에, 주익과 날개에는 큼지막하게 U.S.NAVY 글자를 황금빛 도는 페인트로 칠한, 비정규 도색이었다.

[1946년 그루먼 공장에서 포즈를 취한 블루엔젤스 대원들.]

 블루 엔젤스는 1946년 6월 15일 잭슨빌의 크레이그 시립 공항에서 첫 무대를 가졌다. 그 후 각지를 돌아다니던 블루 엔젤스는 그루먼 공장에서 F8F-1 다섯 대를 수령했고, 당시 공장에서 행해진 푸른 바탕에 금색 글자로 이루어진 블루 엔젤스의 도색 패턴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46년의 공연에 앞서 도열한 베어캣들.]

 이후 블루 엔젤스는 1949년 8월까지 베어캣을 타고 공연했으며, 그 후 F9F-2 팬써로 기종을 전환하였다. 지금까지 놀라운 곡예를 펼치는 이들은 지금까지 정비 문제로 공연을 취소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미 육군의 '썬더버드' 보다 7년이나 앞섰다.

 

*동남아시아의 사향고양이

 베어캣은 1950년대까지 미 해군에서 현역으로 운용되었음에도, 미군은 그들의 공격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또한 그들은 이미 A1H 스카이레이더, F4U 콜세어 등의 충분한 공격기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 전쟁에서 운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공군은 특이하게도 근접 항공지원을 위해 베어캣을 사용하길 원했다. (1950년대 초 동남아 지역에서 프랑스 공군은 베어캣뿐만 아니라 구할 수 있는 비행기라면 모두 사용했다.) 그리하여 베어캣의 마지막 전장은 동남아시아가 되었다.

 프랑스는 1951년경 인도차이나 지역 (이후 베트남이라 불리울)에서 베트민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에 직면하여 큰 싸움을 벌이게 되었고, 때맞춰 미 항공모함 전대는 슬슬 F9F나 F2H 등의 제트기로 교체하는 중이었다. 이 이해관계로 인해 미국-프랑스 사이에 상호 방호 프로그램(Mutual Defence Assistance Program)이 발효하여 잉여 F8F-1과 F8F-1B를 프랑스 공군에 제공하였다.

 

[프랑스인 조종사와 지상요원이 포즈를 취했다. 주익 파일런에는 프랑스제 500파운드 폭탄이 달려 있다.]

 프랑스의 체계에 맞춰 전투기의 무전장비와 연료계통을 개조하는 것 정도는 쉬운 일이었지만, F8F-1D로 명명된 이 기종들을 몰게 될 프랑스 조종사들이 문제였다. 이들은 이전에 세발자전거 형식의 랜딩기어를 지닌 P-63을 몰고 있었는데, 반면 F8F는 꼬리바퀴식이었고, 또한 프로펠러 직경이 매우 컸다. 이 차이점에 쉽게 적응치 못한 몇몇 조종사들은 착륙시 큰 사고를 일으켜 비행기를 심하게 망가뜨리곤 했다.

 

[저공으로 날아가며 네이팜 탱크를 투하하는 프랑스군의 베어캣.]

 1954년, 100대가 넘는 베어캣들이 하노이 근교의 공항에 배치되어 있었다. 프랑스 조종사들은 베어캣의 높은 비행성능과 단거리 이착륙 성능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지만, 전폭기로써 베어캣의 가장 큰 결점은 짧은 항속거리였다.

 

[디엔비엔푸 전투.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손을 뗀다.]

 특히 이 점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어캣의 운용에 심각한 문제가 되어, 공격에 큰 지장을 주었다. 3월 12일에는 다른 9대의 항공기와 함께 7대의 베어캣이 대공포화에 맞아 손실되었다. 전투 내내 베어캣 운용부대는 베트민들의 대공화망에 걸려 줄줄이 손상을 입고 격추되었으며, (베어캣만의 손실 내역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프랑스는 총 64대의 비행기를 잃고 167대가 손상당했다.

 

[남베트남 공군의 베어캣. 미군과 국적마크가 거의 비슷하다.]

 디엔비엔푸 전투의 패배로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물러났고, 프랑스는 더 이상 베어캣을 운용하지 않았다. 프랑스 공군이 버리고 간 25대의 베어캣은 미국에게 반환되었고, 이 베어캣들은 상호 방호 프로그램(MDAP)의 일부로써 남베트남 공군에게 넘겨졌다. 비엔 호아에 주둔한 제 1 전투비행단이 이들을 운용했으며, 예비부품의 부족 등으로 인해 이들은 제대로 운용되지 못했다. 1959년 8월까지 그들은 베어캣을 운용했고, 불과 한 달 후 베트콩들이 고딘디엠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남베트남 공군은 새로운 제트기를 원했으나, 그들이 받은 것은 역시 미 항공모함 부대에서 퇴역한 스카이레이더들이었다.

[태국 공군의 베어캣들.]

 

한편 프랑스의 철수로 인해 태국 또한 북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느꼈고,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미국 군사 자문단이 왕립 태국 공군의 확장을 도우러 갔고, 태국에 도착한 USS Cape Esperance (CVE-88)에서 50대의 잉여 F8F-1을 공여하는 방안이 수립되었다. 또다른 79기의 F8F가 전술 전폭기 부대에 지원되어, 왕립 태국 공군은 총 100대의 F8F-1과 29대의 F8F-1B를 수령하였다. 오직 F8F-1만이 임무에 투입되었고 F8F-1B들은 부품용으로 뜯겨졌다고 하며, 1960년대 F-84G 썬더제트와 F-86 세이버들로 교체되기까지 운용되었다.

 

*종언

 

 나름 기구하다면 기구하다고 할 수 있고, 할 일을 다했다면 그리하였다고 볼 수도 있는 이야기를 가진 항공기가 바로 이 베어캣일 것이다. 2차 대전에는 너무 늦어 제 활약을 하지 못했지만 수 년간 미해군의 중요한 전력이었고, 프로펠러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대전후 인도차이나 지역의 분쟁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미쯔비시 A7M2 렛푸(열풍). 종전까지 불과 8대밖에 만들어지지 못했다.]

 태평양 전쟁이 좀 더 길어졌다면 헬캣이 제로를 상대한 것처럼 베어캣이 렛푸를 상대했을 것이고, 일본 본토 침공작전과 함께 전쟁의 마지막에 등장한 두 전투기에 대한 풍성한 이야기도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미, 일 양국 모두에게 다행하게도 전쟁은 좀 더 빨리 끝났고, 한반도는 광복을 맞았으며, 세계를 떨게 했던 전체주의는 종말을 맞았다.

 

 F8F 베어캣은 총 1,266대가 생산되었고, 미 해군에서는 1955년, 태국 공군에서는 1960년에 퇴역하였다. 전장에서는 별 볼일 없었던 베어캣에게 가장 큰 명예를 가져다 주었던 무대는 다름아닌 에어쇼와 실험비행 무대였으며, 개조된 여러 베어캣은 많은 기록을 갱신했고, 지금도 생존한 몇몇 기체들은 가끔 벌어지는 에어쇼의 인기있는 주인공이 되었다.

* F8F 베어캣 일러스트 *

1944년 8월 21일 처녀비행한, 첫번째 베어캣 XF8F-1

 

1946년 초, VF-3 소속의 F8F-1

 

1948년, 블루엔젤스에서 사용되던 베어캣

 

'Beetle Bomb'. 눈에 띄는 노란 도색의 이 기체는 블루엔젤스에서 단독 공연을 펼쳤다.

 

1950년, 항공모함 Boxer 함상에서 작전하던 VF-151 소속의 F8F-2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군에 의해 사용된 F8F-1B

 

1960년대, 남베트남 공군 제 1전투비행단 소속의 F8F-1

 

F8F-1은 왕립 태국 공군의 제 1,2 전투폭격비행단에서 운용되었다. 이 베어캣은 제 1 전투폭격비행단의 도장을 하고 있다.

 

G-58A 베어캣은 F8F-1의 민간용 형태로, 표준적인 군용 베어캣에 비해 3,000 파운드 정도 가벼웠다.

 

Bill Fornof씨가 조종한 이 F8F-2는 미 전역을 돌며 에어쇼에 출연했다.

 

by 진주맹호 | 2010/08/16 12:11 | 트랙백 | 덧글(0)

전쟁에서 우리에게무엇을남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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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의 피해는 세계 전쟁사에서 몇 번째인가?

6.25전쟁은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통해 치른 전란 중에서 가장 처참하고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56년전 그날 이 땅위에서는 한민족 5천년 역사 이래 가장 많은 국가인 25개국 약 150만명의 군인이 미니(mini) 국제전쟁을 치렀다.

그 결과 한국군 62만명, 유엔군 16만명, 북한군 93만명, 중공군 100만명, 민간인 피해 250만명, 이재민 370만명, 전쟁미망인 30만명, 전쟁고아 10만명, 이산가족 1,000만명 등 당시 남북한 인구 3,000만 명의 절반을 넘는 1,800여만명이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천문학적인 숫자는 미국이 5년간 치른 남북전쟁(Civil War)에서도 인구 3%에 해당하는 100여만 명이었고, 제2차세계대전시 최대의 피해를 입었던 유럽도 인구의 10%인 3,000만 명이 인명손실을 입었을 뿐이다. 물적 피해도 인명피해 못지않게 컸다.

이처럼 6.25전쟁은 피해면에서 제1ㆍ제2차 세계대전에 이어 3번째로 많은 피해를 낸 20세기 또 하나의 국제전쟁이었다.

-관련자료-
[6.25 참전국현황]
[6.25당시 남북한 군사력 비교]
[6.25 인명피해 현황]
[공산군 인적피해]

by 진주맹호 | 2010/03/30 15:30 | 트랙백 | 덧글(0)

휴전협상과 고지쟁탈전에서의 휴전협상의실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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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휴전협상의 배경과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휴전 협상 배경

유엔군(미국)의 휴전회담 수용 배경 미국이 중공군의 ‘4-5월 춘계공세’를 물리치고 38도선 이북을 회복하는 등 군사적으로 충분히 승리할 수 있음에도 이 무렵 공산측의 휴전회담을 받아들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은 전쟁을 전면적으로 계속하기 위해서는 20만 명의 정규군이 더 필요하고, 이러한 미군 1명을 한국에 주둔시키는데 연간 4,500 달러라는 막대한 비용이 추가로 필요했다. 따라서 20만명이면 단순 추가 비용만 해도 9억 달러의 예산이 더 소요되기 때문에 의회에서 통과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둘째, 미군의 인명피해가 너무 컸다. 1951년 6월말 미군의 전사망자는 21,300명이고, 부상이 53,100명이며, 실종 및 포로가 4,400명으로 모두 8만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이는 전쟁 기간 약 14만명의 미군 피해의 약 60%를 차지하는 엄청난 피해였다.

셋째, 미국은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전쟁 이전 상태를 회복한 1951년 6월이 휴전회담을 할 수 있는 적기라고 판단했다. 유엔군은 해-공군력을 앞세워 평양-원산선까지 올라갈 수 있겠지만, 이럴 경우 중국과 소련이 휴전에 응하지 않을 것이며, 또 다시 북진할 경우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와 병참선의 신장으로 군사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을 고려했다.

공산군(중공-북한-소련)의 휴전회담 수용 배경 중공과 북한은 1951년 6월 휴전을 대체로 희망하고 있었으나, 병력을 파견하지 않은 채 물자 및 장비만을 지원하고 있던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추가적인 지원을 약속하면서 독전을 강요했다.
[소련UN대표 말리크의 휴전제의 사진]

중공은 1951년 춘계공세에서 입은 약 10만명의 인명피해와 화력의 절대 열세는 향후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중공은 소련이 지원하기로 약속했던 60개 사단분의 전투장비 및 군 보급품에 대해 스탈린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휴전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중공은 전쟁 이전 상태인 38도선만 보장된다면 휴전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

북한의 김일성도 1951년 전선 상황을 보고 휴전을 고려하게 되었다. 북한은 유엔군의 북진작전에 맞서 개입한 중공군에 힘입어 전세가 호전되긴 하였으나,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한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참전으로 최악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북한전역은 미 공군의 공격으로 초토화되어 북한에는 더 이상 폭격할 목표물이 없게 됨으로써 김일성은 체제 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유엔군의 상륙작전이 감행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휴전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스탈린도 정전에는 반대했으나, 결국 북한과 중공의 설득으로 휴전에 동의하면서 휴전회담을 배후에서 조정했다. 소련은 미국의 개입과 유엔군의 38도선 돌파라는 상황에 접하면서 6.25전쟁을 하나의 실수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소련의 고민은 바로 확전(擴戰)의 가능성이었다. 소련은 한국전쟁이 미?소간의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결국 소련도 그들의 위신이 크게 손상되지 않으면서 중?소 관계에 깊은 상처를 내지 않는 가운데 38도선 부근에서의 휴전을 내심 바라고 있었다.
[도표]

휴전 협상 진행과정

1951년 7월 10일에 개최된 첫 회담은 조이 미 해군중장을 수석대표로 한 5명(한국측 대표 1명)의 유엔군측 대표와 남일을 수석대표로 하는 5명(중공군 대표 2명)의 공산군측 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 날 회담에서는 쌍방이 서로 인사를 교환하는데 그쳤다.
[휴전예비회담 조선일보 보도기사]

7월 11일부터 양측 대표들은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갔으나 시초부터 쌍방은 협상에 임하는 자세에 큰 차이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유엔군측이 협상의제의 채택, 군사분계선의 설정, 휴전 감시 방법 및 그 기구의 설치, 그리고 전쟁포로에 관한 문제 등 휴전에 선행되어야 할 순 군사적인 문제만을 협상을 통하여 해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휴전회담에서의 양측대표 사진]

이에 반하여 공산군측은 쌍방이 적대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하는 문제와 한반도로부터의 외국군 철수 문제가 우선적으로 토의되어야 한다는 정치적 주장만을 앞세움으로써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던 중 협상을 시작한지 16일 만인 7월 26일에야 쌍방은 다음과 같은 협상의제와 토의 순서에 합의했다.

제1항 협상의제의 채택
제2항 군사분계선의 설정
제3항 휴전 감시방법 및 그 기구의 설치
제4항 포로교환에 관한 협정
제5항 쌍방의 당사국 정부에 대한 건의


쌍방은 이 날 채택된 의제와 순서에 따라 협상을 시작하여 1953년 7월 27일 제159차 본회담에서 휴전을 정식으로 조인하게 되었다. 2년 동안의 휴전회담 기간 중 양측은 1회의 예비회담을 비롯하여 159회의 본 회담, 179회의 분과위원회 회담, 188회의 참모장교 회담, 238회의 연락장교 회담 등 총 765회의 회담을 갖고 휴전 회담 개시 2년 만인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체결하게 되었다.

by 진주맹호 | 2010/03/30 15:29 | 트랙백 | 덧글(0)

중공군은언제침공하였는가 왜침공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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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공군의 침공동기와 규모는?

침공동기

중공은 8년간의 항일투쟁과 4년간의 국공내전을 치른 후에 1949년 10월 1일 중국 대륙에 공산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에서는 월맹, 북한에 이어 세 번째로 공산화가 된 나라이다. 6.25전쟁 당시 중공은 신생국가로서 대내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에 무력개입을 감행한 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 의해서다.
[모택동과 김일성 사진] [모택동과 팽덕회 사진]

첫째, 자국의 안보적인 측면에서 한반도에 공산 정권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중공정권 수립 후에도 북한과는 이념을 같이하는 국가로서 밀접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일 북한이 한반도에서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패배할 경우 이념을 달리하는 국가가 한반도를 통일하게 될 것이므로 이렇게 되면 자국의 동북방 안보에 중대한 위협이 될 것으로 판단한 나머지 중공은 북한지역을 지정학적인 완충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중공군의 항미원조 사진]

둘째, 소련으로부터 경제 및 군사력 건설에 필요한 원조를 획득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중공은 오랜 내전 끝에 수립된 신생국가로서 민생문제의 개선과 대만의 해방이 최우선 정책과제였으므로 자력으로서는 이를 해결할 만한 능력이 없었으므로 전쟁의 참전 대가로 소련으로부터 원조를 받아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 보려는 의도에서 참전하게 되었다.
[스탈린의 중공군 파병요청 서한]

셋째, 정치적 사회적 면에서 국가의 안정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당시 중공은 공산정부를 수립하기는 하였으나 대만이 미국의 지원하에 본토 수복을 추진하는가 하면 국내에서도 이를 지지 또는 지원하는 반공 및 반 혁명 세력이 잔존하여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군 내부에서도 수 많은 국부군 출신과 이질적인 인적 요소들로 인하여 불평불만이 팽배해지고 있었으며 파벌이 형성되는 등 반란의 소지를 안고 있어 정군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중공은 이와 같은 내부적인 불안정 요인들을 제거하거나 해소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6.25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중공의 6.25전쟁 참전을 위한 군중대회]

넷째, 중공은 전쟁에 참전하여 패배 일로에 있는 북한 공산정권을 지원함으로써 당시 동남아 일원에서 움트고 있던 공산주의 활동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어 동남아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세계적인 무대에서도 자국의 위치를 부각시켜 대만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억제하는 한편 유엔 대표권의 문제에도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속셈으로 참전을 하게 되었다.
[모택동의 중공군 참전 결정 서한]

침공규모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이 6.25전쟁에 개입할 당시 중공의 지상군은 5개 야전군(野戰軍) 예하에 20-22개 병단(兵團), 71-75개 군(軍), 210-245개 사단(師團)으로 총병력은 2,438,000명으로 추정되었다. 이 중 5개 야전군 예하의 5개 병단 25-27개 군, 75-81개 사단이 항미원조지원군(抗美援朝志願軍)’이란 이름으로 6.25전쟁에 참전하였다.
[압록강을 건너오는 중공군의 전쟁물자]

최초로 6.25전쟁에 투입된 중공군은 제4야전군 예하 제13병단 6개 군 18개 사단으로서 이들은 1950년 10월 19일부터 압록강을 도하하였고 총병력은 180,000명이었다. 두 번째는 제3야전군 예하 제9병단 3개 군 12개 사단 약 120,000명이 11월 초순에 압록강을 도하하였다. 이때는 한국군 및 유엔군이 청천강-풍산-길주까지 북진하여 있을 때였다.

세 번째는 1951년 2월-3월에 제2야전군 예하 제3병단 3개 군 9개 사단과 제1야전군 예하 제19병단 3개 군 9개 사단, 그리고 제13병단 제47군 3개 사단 등 모두 21개 사단이 압록강을 도하하였다. 이 때는 한국군 및 유엔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평택-삼척선까지 후퇴하였다가 재(再) 반격작전을 실시하고 있을 때였다.

네 번째는 1951년 6월에 제20병단 2개 군 6개 사단과 제13병단의 1개 군 3개 사단 등 9개 사단이 입한(入韓)하였으며, 최초로 입한한 제13병단의 1개 군(제66군)은 복귀하였다. 이때는 한국군 및 유엔군이 재 반격작전으로 중공군을 38도선 이북으로 격퇴하고 문산-철원-김화-간성을 연하는 선에서 상호 대치하고 있을 때였다.

다섯 번째는 1952년 9월부터 1953년 1월간에 제3야전군 예하 제9병단 4개 군 12개 사단, 제20병단 1개 군 3개 사단, 그리고 제13병단 1개 군 3개 사단 등 18개 사단이 입북(入北)하였고, 최초로 들어온 제13병단의 1개 군(제42군)과 두 번째로 들어온 제9병단 3개 군(제20ㆍ제26ㆍ제27군)이 철수하였다. 이때는 휴전회담이 진행 중이었으며 쌍방은 상호 대진 상태 하에서 고지쟁탈전을 치르고 있을 때였다.

마지막으로 1953년 1월에 입한(入韓)을 끝으로 중공군은 더 이상 북한지역에 병력을 증강시키지 않았다. 그 밖에 휴전 이후 교체기에 들어온 1개 군까지 합하여 6.25전쟁 기간 중 북한지역으로 이동된 중공군의 총규모는 25-27개 군에 75-81개 사단으로 병력수는 약 100만 명에 달하였다.

by 진주맹호 | 2010/03/30 15:28 | 트랙백 | 덧글(0)

미군,유엔군 위기에빠진한국을 어떻게 도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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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 초기 미 해군과 공군의 지원과 역할은?

전쟁 초기 미 해ㆍ공군이 6.25전쟁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전쟁초기 미해공군은 전투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출동한 지상군 부대가 낙동강선에서 전력을 갖추어 반격의 여건을 조성할 때까지 크게 기여했다. 비록 미 지상군이 전쟁 발발 1주일 만에 한반도에 전개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때 미 지상군은 축차적으로 투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군 T-34전차에 대응할 만한 전차 및 대전차무기도 없이 참전했기 때문에 낙동강 방어선까지는 속수무책이었다. 지상군의 이러한 전력의 공백을 미해공군이 보충해 주었기 때문에 유엔군은 부산교두보를 확보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다.

특히 전쟁 초기 미 해ㆍ공군의 활약은 동해안에서는 미 전함에 의해 북한군의 전진을 함포로 저지했고, 전선지역에서는 근접항공지원임무 지원을 통해 지상군 작전을 지원했다. 또한 미 해ㆍ공군은 일본에 있는 항공기지 및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전투기 및 전폭기들이 남북한 지역에 대한 전략폭격과 병참선 차단, 그리고 적의 전진을 방해할 수 있는 교량 등을 폭파함으로써 북한군의 전진을 지연시켜 그들이 계획했던 작전을 수행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극동공군 작전구역]
[극동공군조직]
[극동해군조직]
[극동공군전력]
[극동공군 전술부대배치]

낙동강 방어선에서의 융단폭격은 적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최대 공략지역인 왜관으로부터 대구 및 부산에 이르는 적의 주요 접근로 상인 구미 일대에 융단폭격을 실시함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병력 및 물자의 집결을 할 수 없도록 공포심을 유발케 했다. 이후 북한군은 미군 및 유엔군의 해공군의 위력 앞에 전략적 기동을 위한 병력 집중을 시도하지 못했다.

-UN군의 항공기사진-
[1] [2] [3] [4]

by 진주맹호 | 2010/03/30 15:26 | 트랙백 | 덧글(0)

6.25 몇단계로 이루어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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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개시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만 3년 1개월 2일간 계속되었다. 그 동안 쌍방은 38도선을 각각 3회씩이나 넘나들면서 남으로는 낙동강, 북으로는 압록강까지 오르내리며 전 국토의 80%에 달하는 지역에서 전투를 전개했다. 이렇게 치른 6.25전쟁은 대체로 4단계를 거치며 전개되었다.

첫째 단계는 북한군의 남침기(1950. 6. 25 ~9. 15)로 북한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낙동강 선까지 이르렀던 시기를 말한다.
둘째 단계는 유엔군의 북진 및 반격기(1950. 9. 15~ 11. 25)로 한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낙동강 전선으로부터 38도선을 넘어 소련과 만주 국경의 초산-혜산진 선까지 진격하였던 시기를 말한다.
셋째 단계는 중공군의 침공 및 유엔군의 재반격기(1950. 11. 25~51. 6. 23)로 중공군의 개입과 더불어 단행된 공산군의 대공세로 유엔군이 평택-제천-삼천 선(37도선)까지 후퇴한 다음 재반격 작전으로 38도선을 회복하게 되는 기간까지를 말한다.
넷째 단계는 휴전협상과 교착전기(1951.6.23~1953.7.27)로 휴전회담의 진행과 더불어 쌍방이 38도선 부근에서 고지쟁탈전을 전개하며 휴전에 이르는 기간을 말한다. 이들 전쟁단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북한군의 남침단계, 50.6.25~9.15

[북한군 남침시 진출선]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그들의 남침공격대로 38도선 전역에 걸쳐 야포와 박격포의 공격준비사격과 더불어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북한군은 서쪽의 옹진반도로부터 개성, 동두천, 포천, 춘천, 주문진에 이르는 38도선 전역에서 지상공격을 개시하는 한편,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 제945육전대와 제766부대를 상륙시켰다.

서울을 목표로 정한 북한군의 주공집단인 제1군단은 연천과 운천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축선과 개성과 문산으로 이어지는 접근로에 전투력을 집중하였고, 춘천, 강릉을 목표로 한 조공집단인 제2군단은 화천-춘천 접근로에 중점을 두고 소련제 T-34전차와 76밀리 자주포를 앞세우고 일거에 국군의 38도선 방어진지를 돌파한 후 남진을 계속했다.

기습공격을 받게 된 국군은 우선 전방 방어 병력만으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한편, 후방 주둔 사단을 긴급히 전방으로 이동시키면서 이에 대응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38도선이 돌파당하고 6월 28일에는 서울과 춘천, 그리고 강릉이 적에게 점령당했다.
[서울시청앞 북한군 탱크]

그 후 국군은 한강 이북지역에서 철수한 병력과 이남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병력을 통합하여 임시로 편성된 시흥지구전투사령부의 지휘하에 한강방어작전을 수행하여 7일간을 그곳에서 지탱한 후에 7월 4일 한강선을 돌파당하게 되어 평택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 때 중부전선에서는 7월 2일에 원주가 점령당하고, 동부전선에서는 7월 4일 삼척이 점령된 후 지연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유엔군의 파병이 결정되고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미 제24보병사단의 스미스특수임무부대가 오산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으며, 국군은 7월 4일 평택-제천-울진을 연하는 선에서 유엔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사진]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은 여전히 상대적인 전투력의 열세를 만회하지 못한 채 북한군의 계속적인 압력에 밀려 차령산맥-금강-소백산맥 선에서도 이들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부득이 지연전을 실시하면서 8월 1일에는 낙동강선인 마산-왜관-영덕을 연하는 선까지 물러나게 되었다.

그 동안 유엔군사령부가 창설되고 미 제8군사령부도 대구에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고 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이양되었으며 유엔군이 제해권과 제공권을 확보하는 등 6.25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유엔군의 작전지휘체제와 기반이 갖추어졌다. 이 때 국군도 2개 군단 5개 사단으로 재편성되어 전쟁 직전의 병력 수준으로 전력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으며 최소한의 전투경험도 쌓게 되었다.

이와 반면에 북한군은 그 동안의 계속된 공세행동으로 많은 병력의 손실을 입게 되어 사단의 전투력은 50~60% 수준으로 감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따른 보충이 뒤따르지 못하였으며. 병참선은 300여 km로 신장되고 유엔 공군에 의해 보급로가 차단되는 등 전력이 급격히 저하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북한군의 공세작전이 거의 한계점에 이를 무렵 국군과 유엔군은 국군 5개 사단과 미군 3개 사단을 마산-남지-왜관-낙정리-영덕에 이르는 240km에 달하는 낙동강 방어선에 배치하고 비교적 조밀하게 압축된 방어지역에서 전세 만회를 위한 방어태세에 임하고 있었다. 이 낙동강 방어선은 국군과 유엔군으로서는 더 이상 물러설 공간이 없는 최후의 방어선이고 반격작전을 위한 교두보이기도 하였으며, 일명 부산교두보 또는 워커 라인(Walker Line)이라고도 불리었다.
[파괴된 왜관철교]

낙동선까지 진출한 북한군은 마지막 남은 총력을 기울여 8월 5일부터 낙동강 도하공격을 개시하여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이른바 8월공세(50.8.25~20)와 9월공세(50.8.31-9.15)를 감행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려 하였으나 함안-창년-왜관-영천-포항 선까지밖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북한군은 여기에서 많은 손실을 입게 되고 이에 때한 후속지원이 뒤따르지 못함으로써 9월 중순 경 그들의 전력은 더 이상 공격을 지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낙동강에서의 피란민 모습]

이와 반면에 국군과 유엔군은 계속된 전력의 보충과 증원부대의 도착으로 상대적인 전투력의 우세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이 때부터 작전의 주도권은 국군 및 유엔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기습공격으로 개시된 북한군의 남침공격은 일일 평균 10Km의 속도로 낙동강 선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였으나 그곳에서부터는 국군과 유엔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대구마저도 점령하지 못한 채 공세가 꺾이고 말았으며 공격개시 82일 만인 9월 15일 이후에는 국군 및 유엔군의 총반격으로 그들의 기도가 좌절되고 말았다.

by 진주맹호 | 2010/03/30 15:25 | 트랙백 | 덧글(0)

6.25

지도 : 크게보기
1) 북한의 남침계획은 소련군사고문단에 의해 작성되었다.
2) 국군 방어계획은 단지 계획에 불과했다.
3) 북한군의 전력은 국군의 2배 이상이었다.

<북한군 3단계 계획 전체보기>

1. 북한이 남침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1) 북한의 남침계획은 소련군사고문단과 북한군에 의해 작성되었다.

북한군 3단계 작전계획은 소련군사고문단과 북한군 총참모부에서 작성한 것으로 "남침공격계획"에 포함된 내용이다.

이 계획은 제2차세계대전시 독ㆍ소전의 영웅이자 작전전문가로 전투경험이 풍부한 바실리예프 중장을 비롯한 소련군 대령급의 작전통 10여명이 북한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남침공격계획을 수립하였다.

남침공격계획은 1950년 3월 김일성으로부터 남침공격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도록 지시를 받은 북한군총참모장 강건과 새로 부임한 바실리예프 소련군사고문단장이 중심이 되어 5월 29일 이를 완성하였다.

이 때 작성된 북한군의 남침공격 계획은 총 3단계로 공격일자는 정보 누설과 7월 장마로 인한 부대기동을 고려하여 김일성이 6월 25일로 결정했고 스탈린도 이에 동의했다.

특히 일요일을 공격일로 택한 것은 국군의 경계가 소홀한 틈을 이용하여 기습효과를 최대한 극대화하려는 전략적 의도가 숨어 있었다.
[김일성과 소련군사고문단의 남침회의]

남침공격계획은 3단계로 최초 북한군은 그들의 공격집단을 1번(개성-문산-서울), 3번(연천-의정부-서울), 43번(포천-의정부-서울), 47번(일동-퇴계원-서울) 도로를 따라 집중 공격하여 서울이북의 국군 주력부대를 이중 양익포위로 격멸하고 2일차에 서울을 점령한 후 전과를 확대하여 남해안까지 작전종심 350km를 30일 만에 점령하는 것이었다.
[상황도1]

제1단계는 최초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한 후 서울지역에서 국군주력을 포위 격멸하는 단계로서 전쟁 개시 2일차에 서울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 때 작전종심은 38도선으로부터 수원?원주?삼척까지의 90㎞를 5일 만에 수행하는 것이었다.
[상황도2]

제2단계는 국군 증원 병력을 격멸하고 전과를 확대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북한군은 군산ㆍ대구ㆍ포항까지의 작전종심 180㎞를 14일 만에 수행하도록 하였다.
[상황도3]

제3단계는 국군 잔류 병력을 소탕한 후 신속히 남해안으로의 진출하여 주요 항구를 점령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는 부산ㆍ여수ㆍ목포까지의 작전종심 80㎞를 10여일 만에 점령하는 것이었다.
[상황도4]

이 단계에서 북한군은 미군이 증원하지 못하도록 남해안의 주요 항구를 신속히 점령하여 미군이 한반도에 교두보를 형성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제2ㆍ3단계에서는 이를 수행하기 위한 부대 편성이나 운용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수립되지 않았고, 다만 진출선과 작전목표만 부여되었다.

by 진주맹호 | 2010/03/30 15:24 | 트랙백 | 덧글(0)

k-1tank

◎ 주의 : 본 포스트에 게재된 K-1 전차 사진의 저작권을 포함한 모든 권리는 군사 전문지 월간 "디펜스타임즈"( Monthly Military Magazine "Defensetimes Korea")에 있습니다.
K-1 전차
 유기압 현수장치를 이용해 자세 제어를 하며 매복하고 있는 K-1 전차
  산악지형이 많아 매복 전투가 빈번한 한반도에 최적화된 전차답게 이 기능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제1 K-1 전차의 측후면
  높이가 2.25m에 불과한만큼 전면 폭로면적이 북한군의 T-54/55보다도 적으며 전면 장갑은 균질 압연강판 환산 시 약 500mm에 달하는 방어력을 보유하고 있다.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의 K-1 전차
  K1A1의 배치로 M48A5K 등을 운용하던 보병사단 전차대대도 3세대 전차로 무장할 수 있게 되었다.
  
K-1!!
  이 단어를 보신다면 대한민국 예비역 분들은 K-1A 기관단총을 떠올리시거나 K-1 전차를 회상하시겠지만 요즘 분들이라면 격투기를 떠올리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K-1이라는 명칭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는데 본 포스트에서는 당연히 미국 제너럴 다이나믹스 랜드 시스템과 한국의 합작으로 개발되었지만 국내 연구진들이 설계와 개발에 참여해 한국K-1 전차의 지형에 맞게 최적화시킨 자랑스런 국산전차 제1호인 K-1임을 알려둔다.
  로보트 태권V와 마찬가지일정도로 등장 당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실전배치되어 2세대 전차들로 무장하고 있던 북한을 위협한 K-1 전차!
  본 포스트에서는 K-1 전차의 생산 23주년을 맞이해 K-1 전차가 왜 그렇게 뛰어난 지에 대해 강점들을 하나하나 언급해보기로 하겠다.
 
《 가격대 성능비가 우수한 K-1 전차 》
  미국과 한국의 공동개발로 탄생해 M1 "에이브람스"의 한국형이라는 별칭을 부여받은 K-1 전차는 1984년부터 현대 모비스( 현 로템 )에서 생산에 착수해 1985년 대량 생산형 제1호가 출고되었다.
  이후 국방부에서 호평을 받으며 1987년부터는 대량 생산 체제에 돌입해 약 210대가 생산작전 중인 K-1 전차대되었다.
  한동안 군의 제1급 기밀로 존재를 숨겨왔던 K-1 전차가 "88 전차"라는 별칭을 부여받은 것은 1987년 09월로 이제 임기 말년에 이른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제1호 생산차량에 직접 "88 전차"라는 친필 동판을 부착한 것이 기원이다.
 
훈련 중인 K-1 전차대
  K-1 전차의 등장으로 한국군의 주요 기계화 보병사단과 기갑여단은 신속하게 3세대 전차로 무장해 북한군의 기갑부대에 대응할 수 있었다.
  실제 K-1은 1987년에만 210대라는 만만치 않은 양이 생산되어 이미 완전 편제된 대대까지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별칭이 88 전차라고 K-1의 실전배치가 1988년인 것은 아니다.
  어찌되었든 미국의 기술력이 반영되었지만 우리 기술진도 참여한 K-1 전차는 1987년부터 1997년까지 약 11년의 기간 동안 쉴새없이 생산을 지속했다.
  이 과정에서 포수조준장치가 개량되고 장갑이 신소재로 교체되었으며 점차적으로 발전되어가는 자동화 생산라인에 맞춰 포탑 구조물의 단순화가 진행되는등 적잖은 변화가 있었지만 일선의 기계화 보병사단과 기갑여단, 보병사단에 배치된 차량들을 일일히 다 훑어보며 구분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정도다.
  또한 2006년 이후에는 야간작전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기존의 VS-580 주간용 전차장 조준경을 1993년부터 독자 개발해 완성한 한국형 전차장 조준경으로 대체하는 등 추가적인 개량이 진행될 예정이므로 이제 K-1 전차의 초기 생산형, 중기 생산형, 후기 생산형 등의 구분은 더욱 애매해질 전망이다.
  어찌되었든 K-1 전차는 총 4단계의 생산루트를 통해 1997년까지 총 1,027대가 생산되어 일선의 기계화 보병사단과 기갑여단, 해병대에 배치되었다.
  K-1 전차는 가격대 성능비가 우수한 전차로 대당 23억원( 1997년 생산 당시에는35억원까지 인상 )이라는 상당히 저렴한 비용에 무장을 K-1 전차의 생산라인제외하면 서방측의 3세대 전차에 뒤지지 않는 수준의 성능을 보유하게 되었다. 
  엔진 역시 독일 MTU사의 MB 871 1,200마력 디젤(XK-2에는 1,500마력 탑재 )을 탑재해 준수한 기동력을 자랑하고 주포인 105mm 강선포는 T-72M까지 격파가 가능해 사실상 북한군이 K-1 전차에 맞서려면 중국의 85-ⅡM식이나 96식을 도입하는 길 외에는 전무한 형편이다.
 
현대 모비스( 현 로템 )의 생산라인에서 생산 중인 K-1 전차
  1987년부터 11년에 걸쳐 총 1,027대가 생산되어 일선에 배치되었다.
  거기에 공격력이 취약하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 2001년 이후 120mm 활강포를 탑재한 K1A1이 배치되었으니 그 단점 역시 간단하게 보완되었다.
  K-1 전차는 K1A1이 배치되면서 제20 기계화 보병사단과 수도 기계화 보병사단의 잉여 차량들이 제102 기갑여단을 비롯한 주요 보병사단 전차대대해병대 K-1 전차와 제2군에 넘겨져 전차를 필요로 하는 부대의 전차부족까지 해결해줬으니 K1A1이나 XK-2에게 밀리고 있더라도 한동안 수적으로는 한국군의 주력전차 지위를 잃지 않을 전망이다.
  북한과의 대결을 상정한다면 K-1은 충분히 강력한 전차지만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에 대응하자면 분명 K1A1이나 XK-2 수준의 전차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작전 중인 해병대 K-1 전차
  해병대는 제2 사단의 M48A3K 전차도 K-1으로 교체해야하는 숙제를 안고 있으며 많은 보병사단들이 노후화된 M48A5, M48A5K를 운용 중이다.
  오늘날 한반도의 안보를 유지하며 북한과 대치할 수 있는 것도 K-1의 존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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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하는 K-1 전차들 
《 K-1의 우수한 공격력과 방어력 》
 
신형 한국형 전차장 조준경이 개발되기 전, K-1 전차는 사격통제장치로 360도 전면 감시가 가능한 VS-580 전차장 조준경과 2축 안정화 장치 및 디지털 탄도 계산 컴퓨터, 그리고 열영상장비와 CO2 레이저 거리측정기로 이뤄진 포수용 조준경을 탑재하고 있었다.
  VS-580은 프랑스 SFIM사가 개발한 것으로 360도를 감시하면서 전차장이 조준한 목표물을 향해 포탑을 회전시킬 수 있는 헌터 - 킬러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3배율과 10배율의 주간 시야율을 갖추고 있다.
  포수용 조준경은 생산 1호~477호까지 미군의 M1 에이브람스 전차에 탑재된 기종을 개량한 휴즈사의 GPS를 장착했지만 하필이면 휴즈사가 납품 가격을 23만 달러에서 65만 달러로 급인상하면서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현대 모비스는 478호 차량부터는 보다 현실적인 19만 달러를 제시한 TI사의 GPTTS를 장착해 1,027호까지 장착을 완료했다.
  휴즈사의 GPS는 악천 후에 강하고 주간 3배와 10배의 시야율을 가진 반면 연막 투과력이 약간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는 반면 TI사의 GPTTS는 주간 시야율이 3배와 8배로 GPS보다 열악하고 악천후에 약하지만 눈에 안전한 CO제1 보병사단의 K-1 전차대2 레이저를 사용하며 연막에 대한 투과력과 야간 관측능력이 GPS보다 약간 우수하다.
  예를 좀더 쉽게 들자면 DSLR 중급기의 양대산맥인 니콘 D300과 캐논 EOS 50D 정도의 차이라 해도 무방하다.
  여하튼 K-1 전차는 이들 사격 통제장치를 이용, 야간 작전 시 약 4,000m 거리에서 적 전차를 인지하고 2,000m에서 식별한 후 사격할 수 있어 야간 전투에서 북한 전차대에 대해 우위를 점하고 있다.
  또한 M1 전차의 후속으로 개발된 차량답게 보다 개량된 주포 안정체계를 통해 기동간 사격에서도 M1보다 우수한 명즁률을 자랑한다.
  여기에 K-1 전차는 105mm 주포탄 47발을 적재해 32발을 적재하는 K1A1보다 휴대탄수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K-6 12.7mm 보예탄 3,400발과 M60D 7.62mm 기관총탄 7,200발로 총 10,600발에 달하는 기관총탄을 휴대할 수 있어 이들을 이용해 측면 장갑 방호력 효과까지 거두고 있다.
  공격력 못지 않개 K-1 전차의 장갑은 독일의 레오파르트Ⅱ, 미국의 M1 에이브람스, 레오파르트ⅡA4엉국의 챌린저를 잇는 3세대 전차 4호라는 지위답게 3세대 전차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제 초밤 복합장갑을 적용했다.
  
3세대 전차의 시초인 독일의 레오파르트ⅡA4
  초밤 장갑의 적용으로 K-1 전차는 굳이 소련의 T-72M처럼 순수 장갑판 두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약 330mm에 달하는 복합장갑 방어력이라는 보너스가 적용돼 68년식 7호 발사관과 AT-3 "새거" 대전차 미사일을 비롯한 북한군의 주력 대전차 화기들을 막아낼 수 있는 강점을 갖췄다.
  또한 K-1 전차는 차체 전면과 포탑 전면에 초밤 복합장갑을 적용한 것 외에도 차체 측면에는 사이드 스커트를 장착해 보기륜을 보호했으며 차체 측면 내부에도 알루미늄 허니콤 구조물로 된 공간장갑을 장착했다.
  추가적으로 차체 내부에는 할론 자동소화기와 파편 방지 라이너 등을 설치K-1 전차에 설치된 유기압 현수장치해 피탄 시 전차병들의 보호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 한국 지형에 적합한 자세제어 》
 
 K-1 전차는 국토의 70%가 산악지대라 매복 공격이 잦은 한반도의 지형에 맞게 자세제어 기능을 필수로 탑재했다.
  K-1 전차는 6개의 보기륜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 선두의 2개와 최후미의 1개가 유기압식, 나머지 3개가 토션바로 구성되는 하이브리드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3~-7도까지 차체의 자세제어가 가능해져 유사시 K-1 전차의 주포 부앙각을 보다 상승시켜줄 수 있는 이점을 지니고 있다.
  이 현수장치의 채용으로 조종수의 피로를 최소화시킴은 물론( 높이가 낮기 때문에 조종석의 높이도 제한되어 허리 디스크로 의가사 전역한 불행한 경우도 있었지만 ) 고속 기동 사격 시에도 안정된 명중률을 보장하게 되었다.
  여기에 독일제 1,200마력 디젤 엔진 덕분에 최대 시속 65km라는 만만치 않은 기동력까지 보유하고 있어 치고 빠지기 식 전술에도 유용하게 운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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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동 중인 K-1 전차  《 21세기의 K-1 전차 》
  마무리하며 K-1 전차를 다시금 돌아보자.
  만약 이 전차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21세기 한반도의 안보상황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K-1이 부재 중이었다면 우리 군은 장갑이 약한 M48A3K와 M48A5K에 의존했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누가 먼저 보고 명중시키느냐? 식의 아찔한 전차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더욱이 북한군은 1980년대까지 3,000대 이상의 T-54/55 및 T-62 전차를 배치시켜 우리 군을 크게 위협했다.
  K-1 전차는 이런 아찔한 상황 하에 등장한 구세주, 이른바 "로보트 태권V"와 같은 존재다.
  물론 주변국들이 125mm 활강포나 120mm 활강포로 무장한 전차들을 배치시키고 있는 현 시점에서 105mm 강선포를 장비한 K-1은 분명 구식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3세대 전차의 전체적인 수효로 보자면 K-1은 가격대 성능비가 우수한 전차임에는 부정할 수 없고 여전히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한국군의 실정에서 3세대 전차 부족 문제를 해결해준 1등 공신이다.
  무엇보다 미국 제너럴 다이나믹스 랜드 시스템과 합작 설계와 개발을 했지만 우리 기술진의 의견이 반영된 한국형 전차이자 국산전차 제1호로서 운용 연한까지 한반도의 대지를 누비고 다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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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맹호 | 2009/04/30 10:55 | 한국전 | 트랙백 | 덧글(0)

k-200a1 장갑차

한국 기술진이 개발해낸 본격적인 한국형 장갑차
  2,000대 이상 생산되어 주요 기갑여단 및 기계화 보병사단 예하 기계화 보병 전력의 든든한 리베로
  K-21 배치 이후에도 상당기간 운용 지속
K-200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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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의 : 본 포스트에 게재된 K-200A1 사진들의 저작권을 포함한 모든 권리는 군사 전문지 월간 "디펜스타임즈"(Monthly Military Magazine "Defensetimes Korea" )에 있습니다.
 
 《 한국형 궤도식 장갑차의 필요성을 요구하는 1980년대 》
박정희 대통령 
우리에게는 제대로된 국산화기라는 것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던 1970년대 후반, 세계는 그야말로 공산정권과 자유진영의 격한 대립이 확산되고 있던 시기였다.
 
경제 부흥을 통해 강한 한국을 이끌어 갔던 고 박정희 전 대통령
  그의 기계화 사단 창설 지시로 한국 육군은 오늘날 강력한 전차전력에 이를 뒷받침해줄 든든한 기계화 보병 전력까지 갖춰 북한군에 대응하고 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전차 단독이 아닌 기계화 보병과의 상호엄호를 통한 효율적인 연계작전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1975년, 북베트남군은 기갑부대를 앞세워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함베트남 전쟁락시킴으로써 통일을 완료했다.
  1979년, 소련은 기갑부대를 앞세워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전격적인 작전을 통해 수도 카불을 포함한 주요 대도시들을 장악했다.
  이렇듯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의 추이 속에 한국 역시 기존의 전략을 전면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베트남 전쟁을 통해 기동전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한국군은 유사시 북한의 공세를 저지해내는 것이 아닌 북진을 통한 재통일을 노렸고 헬리콥터 도입 못지 않게 기존 보병들을 기계화시키는데도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국토의 70%가 산악지대로 이뤄진 한반도의 지형상 제대로된 기갑전력이 운용되기 어렵다는 인식과 달리 1950년 06월 25일, 북한 제105 기갑여단의 T-34/85 전차대는 쾌조의 진격을 통'XK-2해 단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함락시키는 기염을 토했고 반대로 미군을 주축으로 한 UN군의 전차대 역시 마찬가지의 전과를 보여줬다.
  휴전이 된 이후 한국군은 다시는 북한 기갑부대에게 짓밟히지 않겠다는 신념 하에 기갑전력 확보에 만전을 기울였고 그 결과 미국제 M36 "잭슨" 구축전차와 M4A3E8 셔먼으로 시작해 M47 "패튼", M48A2C "패튼", M48A3K, M48A5K, M48A5 "패튼" 등 패튼 패밀리를 총 1,200대 이상 도입해 북한군의 T-54/55 전력에 맞섰지만 북한도 이에 맞서 T-62 전차와 개량형인 "천마호"를 생산해 배치함으로써 우리 군 역시 K-1 북한이 현재 추진해야할 T-55 전차의 업그레이드 모델 중 하나인 T-55M전차를 배치했고 2001년 이후에는 K1A1이 배치되어 전차 전력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자랑스러운 XK-2 "흑표"가 배치된다면 한반도의 전차 전력 균형은 완전히 한국으로 기울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장갑차로 대표되는 기계화 보병으로 가자면 얘기는 달라진다.
  북한은 오랜 기간 중국제와 소련제 장갑차 및 보병 전투차를 운용했고 1970년대는 그 격차가 상당한 수준이었다.
  당시 북한의 장갑차 전력에 대응되는 한국군의 주력이라고는 노후화가 서서히 진행된 M113과 기술력이 부족한 시대에 도입해 자체 생산한 KM 900이 고작이었다.KM 900
  더욱이 KM 900은 차륜식이라 시가지나 기지 내에서 융통성있는 운용이 가능할지는 몰라도 한국의 기술력이 부족하던 시대에 생산되었기에 품질 면에서 결코 이탈리아제 CM6614( KM 900의 원형 )에 준하는 수준이 될 수는 없었기에 대체 차량이 필요한 시절이었다.
  
기술력이 부족한 시기에 자체 생산을 해 문제점이 많았던 KM 900 장갑차
  차륜식이라 고기동력을 살려 시가지 등YPR-765에서 운용하기는 좋았고 1980년 광주에서의 실전경험을 통해 방어력도 검증받았지만 신뢰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문제가 많았던 차량으로 K-200이 채용되면서 대부분 도태되었다.
  마침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부흥정책이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둬 1970년대 초부터 자금적 여유가 생기자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은 육군 내에 기계화 사단의 편성(기갑사단이 아닌 점이 아쉽지만 당시 한국군에서 3개 전차연대로 편성된 기갑사단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을 지시한다.
  
 1981년 03월, 대우중공업이 1/10 스케일로 제작한 정밀모형의 형태는 네덜란드 육군이 채용한 YPR-765와 흡사한 부분이 많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북한이 재침공을 M113감행할 경우 이번에는 단순히 방어와 고착견제만이 아닌 북진을 통한 통일을 꿈꾸고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M48 패튼 전차대에 뒤지지 않는 우수한 성능의 장갑차에 탑승한 기계화 보병이 필수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예산 편성이 가능한 시기가 되자 편성을 지시한 것이다.
  
만약 한국군이 M113을 추가 도입했다면 막대한 예산으로 인해 오늘날과 같은 대규모 장갑차 전력을 보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결단으로 오늘날 한국군은 기계화 보병 전력에서 북한을 압도하며 유사시 북진작전의 핵심 전력으로 군림하고 있다.
  《 막상 개발하자니 기술은 없고... 미국과의 합작 시도 》
 
그러나 막상 명령은 떨어졌지만 당시 한국군이 보유한 장갑차라고는 M113과 KM 900 뿐이었다.
  이런 판국에 막대한 요구 수량이 떨어질 것이 불보듯 뻔한 기계화 보병용 장갑차를 충당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M113은 베트남전 당시 RPG-7 등 성형작약탄에 대해 상당히 취약한 방어력을 드러낸데다 제4차 중동전쟁을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낸 BMP-Ⅰ의 73그리스군의 BMP-Ⅰmm 저압포나 AT-3 "새거" 대전차 미사일 등 무장에서도 취약했기 때문에 육군 수뇌부는 기왕 기계화 사단을 편성할 것이라면 차라리 장비는 보다 우수한 것으로 채용하자는 분위기였다.
 
그리스군의 BMP-Ⅰ보병 전투차
  세계 최초의 보병 전투차로 73mm 저압포와 AT-3 "새거" 대전차 미사일을 운용할 수 있어 등장 초기 만만치 않은 위협으로 작용했다
( 곧 그 환상이 깨지긴 했지만 )
  그렇지만 장갑차라는 장비가 하루 아침에 뚝딱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이 독일이나 프랑스, 영국, 미국처럼 독자적으로 장갑차를 개발해본 경험조차 없었기에( 훗날의 K-1 전차도 미국과의 공동 개발을 한 판국이니 ) 종국에는 미국제 M113의 개량형을 도입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 때 미국이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BMP-Ⅰ  1979년, 한국 육군이 기계화 사단 창설을 위해 장갑차를 도입할 의사를 표명하자 M113을 생산하고 있던 미국 FMC사는 대당 230,000 달러라는 상당한 금액을 제시한 것이다( 배 두들기며 20년 이상 좀 보내보려고 하셨나? )
  그러자 육군은 당황한 것이 당연했고 국가의 운명이 걸린 국책사업을 전면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미국 FMC사의 오만한 태도에 격분한 국방과학연구소 및 일부 진보적인 육군 관계자들이 차라리 독자개발을 하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특히 군사무기의 특성상 "정가"라는 개념이 전무한데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무기개발을 할 경우 축적되는 막대한 노하우와 기술력은 차후 외국제 무기를 도입하는데 있어 벌일 협상에서 나름대로 유리한 조건을 우리 측에서 제시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던 것!
  더욱이 국방과학연구소는 말로만 떠공군의 기지경비용 K200A1, 사진 : 월간 디펜스타임즈드는 것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는 곳이었다.
  국방과학연구소 개발진은 곧 가시적으로나마 한국형 장갑차의 기본 구상안을 제시해 개발 승인을 받아 약 2,300만원의 예산을 집행받는데 성공했고 이에 당황한 미국 FMC사는 K-242A1
곧바로 M113의 대당 가격을 174,000 달러( 돈 가지고 장난치면 못쓴다는 것이 증명된 셈 )로 인하했다.
  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국방과학연구소에 기대를 건 육군 수뇌부는 이 가격마저 거부했고 시간이 흘러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난 후 1980년이 되자 국방과학연구소는 보다 구체적인 자체개발 계획서를 국방부에 제출했다.
  그러자 미국 FMC사는 M113의 대당 가격을 77,000 달러까지 인하하는 웃지 못할 생쇼를 벌이고 말았다.
  《 K-200 장갑차의 개발, 고난과 역경의 시절 》
 
1978년 한국형 장갑차의 개발을 위한 안건을 국방부에 제출한 이는 민성기 중령( 훗날 장성으로 진급 )이었는데 막상 개발안을 제출한 그로서도 과연 한국의 기술력으로 제대로된 장갑차를 설계해 생산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더욱이 앞으로의 과정은 험난한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행진 중인 제30 기계화 보병사단의 K-281A1었다.
  막대한 비용을 요구하는 FMC사의 오만한 태도에 화가 난 국방부는 이 자신감 넘치는 이들을 한번 믿어보자는 요량으로 1979년, 민성기 중령과 조남태, 강윤수 등으로 구성된 연구팀에게 해외출장을 지시했다.
  
국군의 날 행사에서 행진 중인 육군 제30 기계화 보병사단 "필승부대"의 K-281A1 장갑차
  K-200은 엔진 출력을 강화한 K-200A1으로 개수된 이후 계열 차량들 역시 별도로 개수되었는데 특징은 엔진에 터보차저를 장착하고 완전 자동변속기의 도입, 연막탄 발사기 및 탐조등 설치 등의 세부적인 개량이 실시되었다.
  또한 보병의 화력지원을 위한 계열차량으로 K-242A1과 K-281A1이 있는데 두 차량의 차이는 탑재 박격포가 4.2인치냐 81mm냐 정도로 외관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이 해외출장을 통해 민성기 중령을 중심으로 한 연구팀은 자체적으로 장갑차와 보병 전투차마더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의 선진국들을 순방했지만 여기서 절망감만을 맛봐야 했다.
 
자체적으로 보병 전투차를 개발해 보유함은 물론 오랜 세월동안 축적된 기술력과 방대한 공장지대를 보유한 서독을 방문할 당시 민성기 중령은 절망감에 사로잡혀야 했다.
  과연 유럽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생산라인과 공장지대, 강 제조 기술 등 주변 산업조건 등은 오랜 세월 열강이라는 축을 구축했던 이들의 후예다운 모습이었고 도저히 한국으로서는 따라잡기가 어려운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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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200A1으로부터 하차하는 기계화 보병들
  K-200A1의 채용으로 한국군은 전차대와 공동 작전수행이 가능한 든든한 리베로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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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전에서 신속하게 기동 중인 K-281A1 장갑차
  81mm 박격포를 탑재한 이 차량의 등장으로 묵직한 81mm 박격포를 포반이 분해해 메고 다니는 중노동을 감수하지 않고 보다 안정된 사격 플랫폼에서 정확한 화력지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동 중인 한국군의 K-242A1과 비호  정말 이대로 한국형 장갑차의 꿈을 포기해야 하나? 하는 심정으로 마지막 방문국인 이탈리아의 오토멜라사를 방문한 민성기 중령 이하 개발팀은 여기에서 약간의 희망을 발견했다.
  초기 이방인들의 자사 생산라인 방문을 달갑지 않게 여겼던 오토멜라사 관계자들이었지만 민성기 중령을 비롯한 개발팀은 학창 시절 배웠던 이탈리아 가곡을 동원하는 등 삼고초려 끝에 마침내 이들의 환심을 사고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성공했다.
  오토멜라 사장이 직접 이들에게 핵심 기밀이나 마찬전두환 보안사령관가지인 액조세 미사일 공장부터 시작해 라스페치아에 소재한 장갑차 공장까지 견학시켜줌으로써 개발팀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K-200의 개발을 추진하는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
  그리고 이 공장 견학을 통해 민성기 중령은 생각보다 규모가 작음에도 장갑차용 판재 절단부터 조립 및 용접하는 공정이 수행되는데 자신감을 얻어 이 정도 규모라면 한국의 빈약한 산업 기반으로도 충분히 장갑차의 생산이 가능하겠다는 확신을 가졌다.
  1981년에는 대우 중공업의 기술진이 FMC 본사의 장갑차 생산공장을 방문해 마찬가지로 자신감을 얻고 귀국했다.
 
《 1979년 12. 12 발발, 전두환 소장의 개발안 승인 》
 
그러나 개발의 자신감을 안고 귀국한 이들에게 또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여전히 해외12.12 군사반란의 주역들에서 도입하자는 의견이 산재해 있어 이들과의 의견 충돌이 빈번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 무렵 1979년 12월 12일, 마침내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 군수차관보 유학성 중장, 제1 군단장 황영시 중장,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 제9 보병사단장 노태우 소장, 제20 보병사단장 박준병 소장, 제71 방위사단장 백운택 준장, 특전사 제1 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 제3 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 제5 공수여단장 장기오 준장 등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면서 하나회가 군부의 실세로 등극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민주화를 늦추말레이시아 육군의 K-200A1었으며 한국군의 역사에 있어 치욕이라 할 반란이었지만 이 반란을 통해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 소장이 한국형 장갑차 개발의 구세주로 등극했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12. 12 군사반란을 통해 기존의 보수적이었던 해외 도입파들이 적잖이 타격을 입은 것을 이용, 국방과학연구소는 대우 중공업에 1/10 스케일의 모형 3대를 제작해줄 것을 요청한다.
 
  우리가 수출해 말레이시아 육군이 운용 중인 K-200A1
  이들 모형은 당시 원화로 300만K-200 화력 강화모델들원이라는 적지않은 액수였지만 대우중공업은 장래성을 고려해 흔쾌히 그 요청을 수락해 1981년 03월, 3대의 정밀 모형을 완성하는데 성공했다.
  모형이 완성되자 민성기 중령은 바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민성기 중령은"차기 장갑차 K-200의 화력 강화형개발 사업은 절대적으로 연구개발로 추진해야 합니다!"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한편 완성된 모형 3대를 탁자 위에 올려놓은 후 군의 장갑차 소요제기와 연구개발의 당위성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모형을 예의주시하던 전두환 소장은 다음과 같이 질제20 기계화 보병사단의 K-242A1
문했다.
 
"으음, 좋아. 아주 좋아! 그런데 정말 자신 있소?"
 
그러자 민성기 중령은 침착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자신있습니다!"
  이에 전두환 소장은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겠소?"라고 물었고 민성기 중령은 "조만간 직도입이냐 연구개발이냐 획득방법을 결정할 때입니다. 따라서 연구개발로..."라고 답했고 전두환 소장은 "알았소, 이만 돌아가시오"라며 대화를 끝마쳤다.
  그리고 다음날 국방부에서는 장갑차 사업을 연구개발로 검토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하마터면 해외 직도입으로 갈뻔했던 장갑차 개발사업이 전두환 소장의 지시로 단숨에 자체 개발로 돌아선 일이었다.
  전두환 소장의 적극적인 지지로 인해 개발은 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1981년 04월 20일, 흥릉 기계창에 모인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진과 대우중공업 기술진들은 본격적으로 한국형 장갑차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 때 최초로 논의된 것은 사전에 제작된 3대의 모형 중 선별된 1인승 25mm 기관포탑 TBAT-1 탑재형이었지만 비용상의 문제로 인해 이 25mm 기관포탑은 포기되었고 훗날 채용된 K-200은 보병 전투차로 분류될 수 있었음에도 결국 장갑차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 군의 너무나도 과도한 요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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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다의  하지만 시련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1982년 03월, 흥릉에서 개최된 군의 최종 평가회의에서는 더욱 당황스러운 요구조건들이 나온 것
  "대구경 대공포, 야사장비, 자동 연막탄 발사장치, 특수장갑 부착을 장착할 수 있을 것"
  문제는 당시 이 조건을 모두 충족하자면 장갑차의 대당 가격이 무려 120만 달러에 달했다는 점인데 당시 군이 확보한 장갑차의 대당 예산이 고작 30만 달러에 불과했으니 그야말로 현실을 철저히 배제한 요구였다.
  결국 육군이 그토록 원했던 차량은 2008년, K-21 보병 전투차로 현실화되어야 했다.
  어처구니없는 군의 요구 조건으로 인해 결국 무장 체계는 사실상 포기되었고 대신 차체에 집중해 안정성이 검토된 베스트 셀러 M113을 기반으로 하되 국방과학연구소와 대우중공업 기술진은 이 차량을 보다 강화한 개량형으로 개발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여기에 대해 육군은 측면장갑이 7.62mm 나토탄을 견뎌낼 수 있는 수준을 요구했지만 장래를 내다본 개발진 입장에서는 최소한 12.7mm 탄은 방어할 수 있어야젤다의 총탑한다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과 FMC의 개량형인 AIFV를 참고해 차체 측면에 증가장갑을 장착할 수 있도록 설계하게 되었다.
  차체에 대한 기본 설계가 어느 정도 완료될 무렵 1984년 06월 30일에는 민간버스용 엔진을 군용규격으로 개조한 D-2840M 엔진과 영국 SCG사의 T300 반자동 변속기를 채용함으로써 동력 체계도 선정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반복했지만 이를 통해 습득한 각종 노하우는 K-21 보병 전투차의 개발 과정에 반영되어 최소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아 개발을 순조롭게 진행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 K-200의 완성! 》
 
훗날 제식명으로 명명된 K-200에서 K는 당연히 "한국"이며 200은 최소 200번의 시행착오를 반복하더라도 개발을 완료해내겠다는 개발진의 굳센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개발진이 개발과정에서 겪은 각종 시행착오는 최소 200번을 넘기고도 남았으니 그 과정이 얼마나 고되었는지를 보여준다고 해야겠다.브릿지 스톤
 
K-200의 개발 과정에서 고무 충격흡수장치의 난제를 해결해준 일본 기업 "브릿지 스톤"
  어찌되었든 장갑과 동력체계, 충격 흡수 등 여러가지 난제를 극복하며 마침내 2대의 선행 시제 차량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제1호 시제 차량은 미국제 6V53T 엔진과 X100-1A 변속기 및 독일 티센사의 HL113 조향장치로 구성되었고 2호 시제 차량은 대우중공업이 독일 만( MAN )사의 민간 버스엔진을 군용으로 개조한 D-2538T를 탑재하고 있었다.
  개발진 입장에서는 신뢰성이 좋은 독일제 엔진을 탑재한 2호 시제 차량에 기대를 걸었지만 광주에 위치하고 있던 육군 기갑학교에서 실시된 주행 시범에서 차체가 심하게 요동쳐 평가관들의 혹평을 들어야 했다.
  이는 엔진의 충격을 흡수하고 차체와의 결합을 안정되게 유지시켜주는 고무 충격흡수장치의 잦은 파손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개발진은 국내에서는 도무지 해결이 되지 않아 결국 세계적인 기술력을 보유한 일본 브릿지 스톤사를 방문해 협조를 요청했고 탁월한 각종 계산을 통해 해결책은 물론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는 덕분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우리의 제식 장갑차인 K-200에 일본의 기K-200A1술력이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일부 불쾌해하실 분들이 계시겠지만 이는 없는 자의 서러움이라는 점이며 우리 취재진들이 대부분 니콘이나 캐논 DSLR 카메라를 사용한다는 점을 감안하자면 우리 역시 기술진을 육성해야할 필요성을 절감하는 부분이라 하겠다.
  일본 브릿지 스톤사의 기술지원으로 문제점이 해결되자 제2호 시제차량은 이후 약 8,000km의 내구도 시험을 큰 문제없이 통과함으로써 평가관들을 만족시켰다.
  또한 이 과정에서 미국 FMC사가 자사의 차량을 표절했다며 지적재산권 침해 주장을 펼치자 대우중공업은 FMC 회장인 말로트를 창원공장으로 초대해 직접 생산라인을 보여주며 영국제 변속기와 대우중공업에서 생산된 엔진을 장착하고 있는 K-200의 차체를 보여줬다.
 
"어디 당신들의 엔진과 변속기, 부품이 쓰였는지 확인해보세요, 찾아볼 수가 없지 않습니까? 고무 충격흡수장치 역시 브릿지 스톤사의 기술지원을 받은 독자 개발품입니다."
 
이로 인해 말로트 회장은 할 말을 잃고 자K-200A1신의 잘못을 시인한 후 귀국했으며 이로서 큰 문제를 해결한 대우중공업은 개발을 지속시켜 마침내 1984년 12월 28일, 최초로 생산된 K-200의 초도 분량이 기계화 보병사단으로 개편을 시작한 제20 기계화 보병사단 "결전부대" 61 기계화 여단 108 기계화 보병대대에 배치되기 위해 출발했다.
 
지난 2007년 지상군 페스티벌 당시 전시된 K-200A1
  사진 취재 : 
만슈타인
  오랜 세월 인고의 노력 끝에 완성된 장갑차가 실전배치를 위해 떠나가는 광경을 지켜보며 국방과학연구소와 대우중공업 기술진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이후 기본형 1,700대와 K-242, K-281, K-263 등의 계열 차량을 합쳐 총 2,200대 이상이 생산되어 제11, 20, 26, 30, 수도 기계화 보병사단과 제1, 2, 3, 5, 102 기갑여단 및 공군의 기지 경비용으로 배치되었다.
  만약 K-200이 없었다면 한국군은 여전히 터벅터벅 행군하는 보병사단이 주축이 되었을 것이고 신속하게 전차대가 뚫어놓은 돌파구를 확장하지 못해 전선의 고착을 야기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K-200의 배치로 한국군은 든든한 기계화 보병전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K-21 보병 전투차가 주력으로 배치되더라도 후방의 보병사단에 인도되어 기동전력으로 활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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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문헌 :
 
월간 밀리터리 리뷰 2008년 02월호
  월간 THE ARMY 2009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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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맹호 | 2009/04/30 10:52 | 한국전 | 트랙백 | 덧글(0)

세계3위의무기수입국 한국

중국, 인도에 이어 세계 3위 랭크
  미국에만 73%, 여전히 한 - 미 동맹과 더불어 미국제 장비에 대한 높은 의존도
  자주국방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단순 수입만이 아닌 라이센스 생산과 더불어 노하우 축적 요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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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1 전차
203 특공여단 공중강습 훈련
 
한국군의 주력 전차인 K-1 전차
  아시다시피 미국 제너럴 다이나믹스 랜드 시스템과의 공동 개발로 이뤄진 한 - 미 합작 전차로 주포는 영국제 L7 105mm 강선포를 미국에서 면허생산한 M68을 다시 한국에서 국산화한 것이다.
  또한 부무장인 K-6는 M2HB/QCB를 면허 생산한 것이며 M60D 역시 미국제를 대우정밀( 현 S&T 대우 )에서 면허생산했다.
  엔진은 독일 MTU사제이고 장갑은 영국제 등등 자체적으로 독자개발을 추진했지만 적잖은 장비는 외국제를 면허생산하거나 수입하는 방식으로 단가를 절감했다.
 
◎ 본 포스트에 게재된 주요 사진들의 저작권을 포함한 모든 권리는 군사 전문지 "월간 디펜스타임즈"( Monthly Military Magazine "Defensetimes" )에 있습니다.
 
필자가 웹서핑을 하던 중 2009년 04월 28일자 연합뉴스에서 놀라운 기사를 하나 발견했다.
 
韓, 세계 3위 무기 수입국< SIPRI >( 원문 읽기)
 
기사의 내용은 한국이 중국과 인도에 이은 세계 3위 규모의 무기 수입국이라는 것!
  뭐 바로 위에 북한과 대치하는데다 준전시태세를 유지하고 65만이라는 만만치 않은 병력을 유지해야 하는 한국군의 특성상 무기를 도입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그리 새삼스럽지는 않았지만 세계 3위 랭크라는 것은 분명 주목할만한 부분이기 때문!
  그것도 중동의 산유국인 아랍에미리트와 함께 공동 3위에 랭크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점을 주목해야 하는데 이는 오랜 한 - 미 동맹으로 인해 상당수의 장비를 미군과 동일하거나 최소한 미국제 부품들을 공용해 군수지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2004~2008년에 걸친 기간 동안 한국군은 미국으로부터 F-15K와 각종 관련 부품, 기술을 도입했고 세종대왕함과 율곡 이이함의 취역 및 건조와 더불어 적잖은 양의 미국제 장비와 부품을 구입했다.
  미국으로서는 꽤 재미를 본 경우라 하겠지만 그 수익의 적잖은 비중이 전비로 충당되니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 하겠다.
  한국 역시 지나친 미국 의존도를 탈피하려는 것인지 러시아로부터 대물 상환 변제로 T-80U 203 특공여단전차와 BMP-Ⅲ 보병 전투차를 도입했고 메티스-M 대전차 미사일은 물론 독일제 판저 파우스트Ⅲ, 프랑스제 미스트랄 등을 도입했지만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미국제가 만만치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공중 강습 훈련 중인 203 특공여단 병사들
  2군 지역이지만 특공여단인 부대의 특성상 PASGT 헬맷이 전원 지급되어 있다.
203 특공여단  당장 우리 군의 대부분이 운용하는 방탄 헬맷만 하더라도 미국제 M1의 형태를 기초로 하고 있는데다 권총탄에도 관통당하는 취약한 방어력을 자랑한다.
   신형 PASGT 헬맷은 여전히 특공여단이나 해병대 등에서만 운용 중이며 보병사단의 경우 중대장이나 대대장급, 아니면 최전방의 GOP 부대 정도에나 지급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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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의 군생활에 있어 가장 개탄스럽고도 증오심을 자아내었던 미국제 기관총인 M60
  다른 국가들이 M240이나 MG 3으로 천하통일할 동안 미국만 고집스럽게 M60을 채용했지만 결국 미 해병대부터 "이딴 총 못쓰겠다!"며 육군용 M240을 7,000정이나 가져다 운용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필이면 독일군의 FG-42의 구조를 기초로 하다보니 신뢰성이라는 측면에서 믾은 문제를 자아내었고 특히 베트남전 당시 나름대로 활약은 했지만 110.49cm라는 짧은 길이에도 불구하고 무게가 10.432kg이나 되다보니 "돼지"라는 별명까지 얻어야 했다.
  한국군은 여전히 M60을 주력 7.62mm 기관총으로 운용 중인데 100발 사격에서 수시로 탄 걸림에 시달렸으면( 필자가 복무한 부대에서는 3발 이상 연발로 나가면 축하해줄 총이 될 정도였다. 거기에 발톱이나 인계철선은 왜 그리 잘 망가지는지 ) 이제 M240B나 자체적인 국산 7.62mm 기관총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K-3는 본격적인 기관총으로 운용하기에는 위력이나 사정거리 모든 면에서 딸리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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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브라우닝이 설계한 M2HB를 신속 총열 교환이 가능하도록 개량한 M2HB/QCB를 면허생산한 K-6
  우수한 신뢰성을 발휘하지만 너무 무겁고 설계 자체가 1920년대니 21세기 전장에는 쉽사리 조화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특히 러시아제 NSV와 비교하자면 그 차이는 더욱 커지는데 불곰사업을 통해 NSVT를 도입, 그 우수한 성능과 가벼운 무게에 감탄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산이 딸리는 것인지, 아니면 K-6로도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인지 한국군은 여전히 이 기관총을 50년 이상 운용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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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공군에 배치된 F-15K "슬램 이글"
  이 전투기의 배치로 한반도 상공의 제공권 다툼은 이제 북한을 넘어 중국과 러시아, 일본과 경쟁을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물론 보잉은 F-15K의 판매와 장비, 부품 공급 등으로 적잖은 재미를 봤지만...
이순신함
이순신함
  한국 해군의 본격적인 대양해군 구축의 효시인 KDX-Ⅱ "충무공 이순신함"
  레이더와 127mm 함포, 하푼 대함 미사일 등 미국으로부터 도입한 장비와 무기들이 적잖이 배치되었다.
  우리 입장에서는 독자 개발로 막대한 개발비가 투입되는 것을 막고 신뢰성과 위력이 검증된 미국제 장비들을 그대로 도입한 셈이니 나름 꿩먹고 알 먹은 셈
인민해방군 해군 육전대 상륙
  한편으로 여전히 신무기 도입에 열을 올리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행보를 보자면 우리로서도 달갑지는 않은 현실이다.

by 진주맹호 | 2009/04/30 10:26 | 한국전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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